라캉은 '소외된 주체($)가 자신의 존재결여(◇)를 대상 a로 채우고자 한다'는 명제를 환상($◇a)으로 공식화하면서 상징계의 언어(他者)로 시작되는 욕망(Desire) 이전에 충동(Drive)이 존재한다고 보았다.고로 무의식을 도식화하면 본능에서 충동으로, 충동에서 욕망으로 발전하면서 일종의 방어기제로써 '인간은 타자(他者)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의식이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를 관장하는 반면, 상상계ㆍ상징계ㆍ실재계의 3계로 구성된 무의식은 쾌락을 추구하는 환상의 세계를 다룬다. 고로 우리의 욕망은 실체가 없는 꿈과 가상현실마저도 직접 접속할 수 있다.모든 개별 주체들이 의식의 이면에 무의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 자신의 실재는 기표가 포획하지 못한 '빈
인간은 쾌락을 탐사하는 존재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면서 로봇처럼 타자에 의하여 지배, 조종되는 삶을 즐기는 수동적 쾌락자가 있는가 하면, 어찌하든지 주어진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며 그 과정을 즐기는 적극적 쾌락자(탈주자)가 있다.라캉은 프로이트의 연구를 바탕으로 무의식을 파헤쳐 마침내 그 구조가 상징계라는 언어 망임을 밝히고 우리를 얽
현대는 무의식, 즉 욕망의 시대다. 이와 관련하여 프로이트 소쉬르 야콥슨 다음에야 라캉이 등장, 베스트 사유체계를 창출했다.야구에서도 1번타자는 베스트가 아니다. 대체로 4번타자가 베스트요 홈런타자다.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가 ‘퍼스트-인-클래스’라면 라캉은 ‘베스트-인-클래스’다.욕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해를 돕기 위하여 라캉이 제시한 욕망의 구조를
삼라만상 중에서 눈에 보이는 실재계의 나무와 언어로 표현된 상징계의 개념적 나무는 다르다. 고로 실재계는, 1차적으로, 도(道)와 같은 무(無)의 세계이자 도착 불가능의 세계다. 그런데 라캉이 밝힌 실재계에는 2차적인 의미가 하나 더 있기에 더욱 난해하다.정신분석학적으로, 바깥에 있는 나무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무의식 속에 남아서 트라우마처럼 작동하는
이 세상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 없다. 그것은 신(神)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전통의 창조적 파괴를 통한 신개념의 발명이 철학이다. 고대로부터 신개념을 발명해온 무수한 철학자들은 '보다 나은 세상'(Better World)을 만들려고 몸부림친 탈주자요 노마드다.약학으로부터 출발하여, '인류를 아름답게, 사회를 건강하게'(라캉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직접 만날 수 없다. 物자체로서의 실재계란 우리가 존재에 직접 다가가서 인식할 수 없는 모든 사물 그 자체를 뜻한다. 고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해와 달도 마찬가지다.존재는 오직 상징을 통하여 다가갈 수 있으므로 존재는 곧 상징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배경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인간은 태고 이래로 문자를
엊그제 군대 간 큰 아들이 전역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 구조가 바뀌면서 가족의 새로운 場이 펼쳐졌다.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며느리가 들어오고 또 한 번 집안 구조가 바뀔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흘러가리라.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한 가정의 구조변화도 이렇게 큰일인데, 인류 문화의 전체 구조에 변화가 생기면 그 영향이 얼마나 클 지 상상
필자가 황당무계한 무한도전을 좋아하기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약물(Drug)이 아닌, 사회약(Social Medicine)을 이미 5년 전에 개발했다고 이 칼럼을 통하여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며칠 전 국내 일간지의 기사를 통하여, 미국 FDA에서 금년 6월에 한 모바일 게임(인데버RX)을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의 치료제로 공식 승인했다(중앙
독창적인 관점과 해석은 독창적인 사상가의 전제조건처럼 간주된다. 힘에의 의지를 역설한 니체의 영향권 안에 있는 들뢰즈는 에서 무의식이 다양한 힘들의 집합장소로서 세계사 즉 인류 문화의 지층 속에 숨어 있다고 보았다.그의 문화 분석에 따르면, 무의식의 역동이 수많은 고원(高原. Plateau)을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의 쾌락을 주는 대신 지갑을 털어가기에 다 주는 것 같으나 도로 다 빼앗아 가는 이중 사회다.들뢰즈는 과거 전제군주 시대를 강도 높은 억압과 통제(超코드화)로 모든 것을 권위에 예속시키는 편집증적 사회로 보는 한편, 현대 자본주의는 기존의 가치와 규범을 무너뜨리면서 등장했기에 脫코드화와 脫영토화에 따른 분열증적 사회로 보았다.나아가 분열
부초같은 인생에서 위풍당당한 삶을 사는 비결은 나름대로 원칙을 정하고 소신껏 사는 일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죽음앞에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길을 택했던 사육신을 들 수 있다.지난 호에서 우리는 들뢰즈에게 있어서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차이와 욕망임을 살펴 보았다. 이로부터 두 가지 명제가 도출된다 : 첫째, 존재는 시동(時動)하
철학이란 흔히 존재론(Why, 나는 왜 사는가?), 인식론(What,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윤리론(How,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즉 과학은 유한을 사유하는데 반하여 철학은 무한을 사유하는 셈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황당무계한 무한도전을 좋아한다. 고로 유한한 약물(Drug)이 아닌, 무한한 사회약(Social Medi
역사적으로 이성의 시작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사유주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부터 비롯된 근대 철학이다. 이처럼 이성은, 출발점이 된 이후 곧 모든 서양철학의 중심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은 계몽주의를 산출하고 급기야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키는 근원이 되었으나 20세기의 양차대전을 몰고오면서 더 이상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맞
인류사에 빛나는 삼대 어록(三大 語錄)을 꼽는다면, '모든 것은 사랑이다'(예수), '모든 것은 투쟁이다'(마르크스), 그리고 '모든 것은 무의식이다'(프로이트)로 정리할 수 있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나 의식도 단순하고 근원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는 구조를 통해 분석 · 설명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바로 구조주의다. 필자는 이 결정론적 구조
헤겔에서 정점을 찍은 관념철학 이후 과거의 전통적인 철학을 거부하면서 망치로 철학하는 독특한 철인이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니체(F. W. Nietzsche, 1844~1900)다. 이번 기회에 스스로 '나는 다이너마이트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의 논박서로 쓴 을 중심으로 니체의 사유 세계와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지난 4호 칼럼에서 칸트철학을 정리한 것은 마치 조국 근대화를 위하여 대한민국에 어렵사리 경부고속도로를 완성한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여세를 몰아 호남고속도로의 건설이 필수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고로 이번 호에서는 헤겔(Hegel)의 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그 의의를 함께 나누고자
필자의 칼럼은 유빕사회를 지향하는 사유의 칼럼이기에 동ㆍ서양의 철학이 백두대간이다. 특히 철학삼분지계(머리ㆍ허리ㆍ다리)에서 서양철학은 다리에 해당한다.그런데 '칸트를 모르면, 서양철학을 본질적으로 시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로 이번 기회에 칸트(Kant, 1724~1804)의 비판철학을 정리하면서 이성중심의 사유체계와 사회약료적 의의를
◇ 인간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다리로 땅을 딛고 사는 존재 사유의 꽃밭을 가꾸겠다고 작정하다 보니, 내 자신의 사유체계를 하나로 꿰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무슨 일이든 체계 없이 시작하면 난개발이 된다. 자칫 꽃밭은커녕, 엉망진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先체계 後개발’이란 명분을 내세움에 따라 필자의 사유체계는 머리ㆍ허리ㆍ다리의 ‘철학삼분지계(
◇인류 존재의 근본적인 사유와 성찰의 계기가 된 코로나19 21세기에 들어와, 인류에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절실하게 맛보도록 만든 것이 코로나(COVID-19)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로나의 순기능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인류에게 존재 상실감을 안기면서 근본적인 사유와 성찰을 도모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