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세계(原初世界)란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기 ‘이전’의 순수 자연의 세계를 말한다. 즉 자연과 인간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조화를 이루는, 무질서한 본질의 세계다. 이처럼 원초세계를 천착하여 현대 철학에서 라캉의 전제(專制. 독재)로부터 벗어난 철학자가 있다. 라캉이 주창한 무의식 3계(상상계ㆍ상징계ㆍ실재계)를 독창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되
의식의 지향성 개념을 확립한 후설(Husserl)의 현상학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두 사람이 바로 사르트르(Sartre)와 메를로퐁티(Merleau-Ponty)인데 절친이면서도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다.사르트르는 의식하는 자아(自我)를 "텅 빈 것"으로 보았기에 칸트(Kant)의 관념론으로 돌아간 반면, 메를로퐁티는 의식 주관 즉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이하 퐁티)는 지각(知覺)의 현상학(現象學)이 다루는 현상의 영역을 현상적 장 혹은 초월론적 장으로 부른다.‘세계-내-몸’으로서 본질을 사유하는 생활세계(현상의 장)의 중심이 지각의 장(場)인데, 의식의 지각만을 강조한 후설(Edmund Husserl)이 놓친 몸(신체)적 지각의 세계야말로 그에겐 "신대
원심분리란 원심력을 이용하여 용액, 혼합액 또는 현탁액(懸濁液)으로부터 비중이 가벼운 부분과 무거운 부분을 분리하는 방법이다.현상학을 공부하면서 문득 (가상의) 원심분리기를 이용하여 신ㆍ인간ㆍ자연이 뒤섞여있는 이 세계를 "홱 돌리면"(전문용어로 '현상학적 환원') 투명한 상층부와 고형물의 하층부로 구분될 것임을 상정할 수 있게 되었다.이처럼 본질이
메를로퐁티(이하 퐁티)는 소위, 3H(헤겔ㆍ후설ㆍ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아 지각의 현상학(現象學)에 대한 사유를 '현상학적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완성하였다.퐁티가 가장 크게 마음을 두고 생각한 것은 경험주의와 지성주의에서 유래된 전통철학의 선입견과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mind-body dualism)적 이분법에 대한 사유방식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있었
비트겐슈타인이나 라캉 등 (천재) 현대철학자는 사물들이 그려지는 모습을 의미하는 사태(事態)의 원인이 '단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N개)로 분리되기 어렵다고 보았다.고로 삶이 "모호한" 것이라고, 그래서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객관주의나 경험중심의 과학만능주의를 비판하며 저항한다. 물론 그들은 우리를 둘러싼 그 안
젊은 나이에 세계와 언어, 그리고 인간의 삶을 날카롭게 분석한 를 저술한 비트겐슈타인.서양 철학사의 모든 논리적ㆍ철학적 문제들을 "본질적으로" 해결했다고 여긴 그는 더 이상 철학을 할 이유가 없다고 보고, 31세에 오스트리아의 시골로 내려가 수년간 초등학교 교사 생활 등을 한다.1929년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스가 보낸 한 편지
우리는 모두 자기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세상을 만나 꿈과 희망을 펼치고자 나름 도전에 나서서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를 쓴다.오늘날 비트겐슈타인이란 이름은 종종 천재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인다. 금수저이자 히틀러와 고교 동창인 그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누구라도 인생이란 자신의 세계관에 좌우되기 마련인데, 그의 저작과 함께 인성에서도 노블레스 오
‘신은 죽었다’(니체)와 ‘근대는 존재망각의 시대’(하이데거)라는 명제에서 드러나듯이, 근대는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들의 씨앗을 이미 자신의 몸 안에 가지고 있는바,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은 근대의 완성이 아닌 극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또한 필자의 관점에서 "사태 자체로!"라는 구호를 내건 후설의 현상이 현재중심의 기계적인 시선
인류사에서 누구도 이렇게 말한 적은 없다 : '존재는 시간으로 해석해야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이것이 이다. 기존질서에 저항한, 위대한 탈주자(노마드)였기에 "하이데거는 하이데거로 읽히지 않는다." 이 말을 현대적인 용어로 줄여서 바꾼 것이 '하하노(No)'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의(定義)는 유(類)개념이 종(種)개념보다
철학은 지식이 아닌 지혜를 사랑한다. 지식은 손에 잡히나 지혜는 갇혀있는 체계가 아니기에,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니듯이, 영원과 무한으로 빠져나가기 마련이다.고로 철학은 진리를 향하여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그에 최적화된 인간과 문화 등을 근원적이면서도 엄밀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예컨대 우리가 '인간은 불안한 존재다'라고 말할 때, 20세기를 살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를 통해서만 의미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선언했다.그 결과, 언어체계로 직조된 사회질서의 상징계를 중심으로 무의식의 3계(상상계ㆍ상징계ㆍ실재계)를 발명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실재계의 무(無)성을 통찰한다.단언컨대, 우리의 존재는 무(無)화될 때까지 욕망과 충동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자 움직인다(動欲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면 맹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진리(眞理)에 도달하기 위하여 표상 즉 현상을 분석하고 검열한다.데카르트 이후 의식 세계에서는 의식의 주체로서 우리의 보는 것, 즉 '시선'(eye)이 전부인 양 간주되어 왔다.라캉은 이것을 뒤집는다. 라캉에 있어 눈은, '그것'(무의식)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동시에 의식의 이면에 있는 그것
라캉은 '소외된 주체($)가 자신의 존재결여(◇)를 대상 a로 채우고자 한다'는 명제를 환상($◇a)으로 공식화하면서 상징계의 언어(他者)로 시작되는 욕망(Desire) 이전에 충동(Drive)이 존재한다고 보았다.고로 무의식을 도식화하면 본능에서 충동으로, 충동에서 욕망으로 발전하면서 일종의 방어기제로써 '인간은 타자(他者)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의식이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를 관장하는 반면, 상상계ㆍ상징계ㆍ실재계의 3계로 구성된 무의식은 쾌락을 추구하는 환상의 세계를 다룬다. 고로 우리의 욕망은 실체가 없는 꿈과 가상현실마저도 직접 접속할 수 있다.모든 개별 주체들이 의식의 이면에 무의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 자신의 실재는 기표가 포획하지 못한 '빈
인간은 쾌락을 탐사하는 존재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면서 로봇처럼 타자에 의하여 지배, 조종되는 삶을 즐기는 수동적 쾌락자가 있는가 하면, 어찌하든지 주어진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며 그 과정을 즐기는 적극적 쾌락자(탈주자)가 있다.라캉은 프로이트의 연구를 바탕으로 무의식을 파헤쳐 마침내 그 구조가 상징계라는 언어 망임을 밝히고 우리를 얽
현대는 무의식, 즉 욕망의 시대다. 이와 관련하여 프로이트 소쉬르 야콥슨 다음에야 라캉이 등장, 베스트 사유체계를 창출했다.야구에서도 1번타자는 베스트가 아니다. 대체로 4번타자가 베스트요 홈런타자다.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가 ‘퍼스트-인-클래스’라면 라캉은 ‘베스트-인-클래스’다.욕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해를 돕기 위하여 라캉이 제시한 욕망의 구조를
삼라만상 중에서 눈에 보이는 실재계의 나무와 언어로 표현된 상징계의 개념적 나무는 다르다. 고로 실재계는, 1차적으로, 도(道)와 같은 무(無)의 세계이자 도착 불가능의 세계다. 그런데 라캉이 밝힌 실재계에는 2차적인 의미가 하나 더 있기에 더욱 난해하다.정신분석학적으로, 바깥에 있는 나무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무의식 속에 남아서 트라우마처럼 작동하는
이 세상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 없다. 그것은 신(神)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전통의 창조적 파괴를 통한 신개념의 발명이 철학이다. 고대로부터 신개념을 발명해온 무수한 철학자들은 '보다 나은 세상'(Better World)을 만들려고 몸부림친 탈주자요 노마드다.약학으로부터 출발하여, '인류를 아름답게, 사회를 건강하게'(라캉식으로
라캉은 지적(知的) 사유의 용광로였기에 의학 철학 인류학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사상을 녹여 고유한 상상계ㆍ상징계ㆍ실재계의 3계를 발명했다.상상계에서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상상을 하는 '환상적인 구조'(나르시시즘의 동일시) 속에 살지만, 이미 구성되어 있기에 통제 불능의 상징계에 진입한 이후에는 '억압의 구조' 속에 살게 된다.왜냐하면 상징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