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미용계의 대모, 미스코리아 배출만 120여명

▲ 마샬 하종순 회장
▲ 마샬 하종순 회장
한국미용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마샬. 1962년 명동점을 시작으로 일대를 장악하는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차별화된 고급시스템은 물론 세분화된 서비스로 고급 뷰티 살롱의 이미지를 최초로 완성하였다. 당시에는 파격적이고 신선한 시도로 미용계 발전에 큰 획을 그었던 인물이 바로 마샬 하종순 회장이다.
 

온화하지만 강인하고, 결단력 있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국내 대표 헤어 디자이너로 꼽히는 박준, 박승철, 준오 등을 배출한 장본인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녀 ‘미스코리아’ 배출만 진 15명을 포함해 120여명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진을 선택하는 안목이 뛰어나 하종순 회장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미스코리아에 당선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스코리아들의 대모이자 후배들에게 대단한 스승이었다.

미스코리아 공중파 방송 시절, 당선자들이 빠뜨리지 않고 소감을 전하던 ‘미용실 원장님께 감사드린다’의 주인공 ‘하종순 회장’을 만나 보았다.

▲ 마샬 논현점
▲ 마샬 논현점
Q. 마샬의 탄생 배경은?
22살 무렵 이모 가게에서 매니저로 일하면서 어깨 너머로 기술을 익혔다. 2~3년 뒤 문을 닫았는데 그때 친하게 지내던 박선생을 따라 우리나라 미용계의 선구자 오엽주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매니저였다가 당시 기술에 목말라 있던 나를 오엽주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고 빠른 기간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매출 톱 디자이너였다가 명동에 마샬 1호점을 오픈하게 되면서 흔히 말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현재는 20여개의 마샬 지점이 있다.

Q. 마샬이 미스코리아의 산실이 된 계기가 있나요?
70년대 초에 우연히 한 명이 미스코리아 미가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진 15명을 포함한 120여명의 미스코리아를 배출하게 되었다. 영국에 한국 유학생이 3명밖에 안되고 외국에 나가는 것이 힘들었던 70년대, 혼자 후보를 데리고 미스 유니버스나 미스 월드 등 해외 대회를 다녔다. 당시에는 모두 가난한 아이들이었고 드레스 한 벌 값도 없어 쩔쩔매곤 했는데 그 아이들을 사비로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로 만들어 냈다.

Q. 그동안 배출한 미스코리아는?
68년 김윤정, 74년 김은정, 77년 김성희, 78년 손정은, 79년 서재화, 80년 김은정, 81년 이은정, 83년 임미숙, 84년 최영옥, 86년 김지은, 90년 서정민, 91년 이영현, 92년 유하영, 93년  궁선영까지 모두 진을 배출 했으며 선에는 대표적으로 고현정, 김혜리, 염정아, 이해정 등이 있다. 

▲ 89년 미스코리아 선 고현정
▲ 89년 미스코리아 선 고현정
Q.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미스코리아는 누구인가요?
고현정. 너무나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던 아이였다. 미소도 너무 예뻤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다만 고등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인지 진이 되지 못하고 선이 됐다. 진을 장담했는데 억울해서 잠이 안 올 정도였다. 그만큼 완벽한 아이였다.

Q. 현재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고현정까지 배출했다면 정말 매의 눈이었는데 미스코리아 양성을 그만둔 이유가 궁금합니다.
93년, 미스코리아 선발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뇌물, 금품사건이 보도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정말 억울하게 조사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 나다. 미스코리아를 양성하면서 사비를 들였으면 들였지, 당선시키기 위해 로비를 한다든지 하는 부끄러운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고 보니 어느새 내가 가해자가 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동안의 노력과 미스코리아에 대한 애정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순수한 나의 의도를 어떻게든 왜곡하려는 수사로 심신이 많이 지치고 괴로웠다. 그 사건 이후로 미스코리아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했다. 상처가 심했다.

Q. 굉장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조사 과정에서 고통이 너무 심했다. 모든 상황을 억지로 짜 맞춰 낸다든지... 조사 받는 과정도 너무나 힘들었다. 대표적인 예로 돋보기가 없어 문서를 읽지 못했는데 담당 수사관이 내용을 음성으로 읽어준다고 했다. 다 듣고 도장을 건네주었는데 이게 잘못되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라고 된 것이다. 내가 키우던 아이가 미스코리아에 당선되면 나 역시 명예로운 일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결단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괴로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 마샬 일산웨스턴돔점
▲ 마샬 일산웨스턴돔점
Q. 미스코리아뿐만 아니라 미용계의 대모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CEO 박준, 준오, 박승철이 나의 제자들이다. 나의 스승은 오엽주 선생님이셨고. 그 당시 최초로 뷰티살롱을 오픈했으며 참 멋있는 여성이었다.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고 명동에 마샬 1호점을 오픈하게 되면서 솔직히 대박행진이 이어졌다. 내 솜씨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당대 최고의 스타들 김지미, 김창숙, 김자옥 등 헤어와 메이크업을 도맡았다. 이렇게 한자리를 굳건히 지키다보니 당연히 제자가 많이 탄생하게 되었고 제자들의 미래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하기도 했다.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여기저기서 제자들이 찾아오곤 한다.

Q. 2000년에 L.C.F Korea를 조직하였는데?
해외 미용단체와의 교류를 통해 기술을 공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하였다. 훌륭한 인재가 되기 위해서 세계 트렌드를 확실하게 읽고 발 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인 성공도 중요하지만 미용계 발전에 큰 도움이 되고 싶었다.

Q. 9년간 대한 미용사회 중앙회 회장직을 역임했다고 들었습니다. 생각만큼 쉽지 않았을 텐데요?
미용계도 경쟁이 심하다. 하루 3시간 자면서 전국 미용실을 돌며 선거 활동을 하기도 했다. 선거 활동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미용실이 영세한 규모에 아기 키우며 운영하는 동네 미용실이 대부분이라는 것. 회장이란 봉사직이며 그 사람들을 위해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세계미용대회를 유치했다. 당시 개막식에 영부인이 참석하는 등 성공적으로 치르게 됐다. 그 후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아시아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또 다들 불가능 하다고 했던 아시아 최초 세계 부회장까지 맡았다.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일 중 하나가 우리나라와 아시아권의 미용인 위상을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다.

Q. 그동안의 미용인으로의 삶 중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대로 된 아카데미를 설립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 된다.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고 질좋은 강의나 노하우를 전수해줬어야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쉬워 지는 것 같다. 무리를 해서라도 설립을 했어야 하나? 라는 후회도 있다.

Q.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가요?, 좌우명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나보다 우리 직원들이 잘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 역할이라 생각한다.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인재 양성이 발전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믿는다. 좌우명은 그냥 성실하게 살자. ‘성실’이란 단어는 평범하지만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평범하지 않다. 그만큼 성실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마샬 전직원은 성실을 모토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오래된 마샬의 역사는 한국미용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스코리아계의 대모, 헤어디자이너의 대모 하종순 회장. 반세기 동안 마샬의 대표로서 일흔을 넘긴 나이임에도 우리나라 미용계 발전을 위한 강인한 의지만은 여전히 지니고 있다. 어쩌면 미스코리아 보다 더 아름답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보급 미녀가 아닐까 한다. 

글 = 박솔리 기자 solri@beautyhankook.com
사진 = 김세진  studiomand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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