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신해철(앨범재킷, 아이돌시절 사진)
▲ 故 신해철(앨범재킷, 아이돌시절 사진)

'마왕' 신해철은 시대를 앞서 갔던 천재뮤지션이자, 아이콘이었다.

가수 신해철이 27일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향년 46세. 그의 삶은 짧았지만, 음악과 도전 정신은 영원히 남았다. 90년대 대중음악의 중심에 머무르지 않았다. '마왕'이라는 영원불멸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신해철은 1968년 5월 6일, 서울에서 1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8년, 신해철은 만 20세에 록밴드 무한궤도로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다. '그대에게'로 대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가요계에 발을 내디뎠다. 무한궤도는 이름처럼 오래 활동하진 못했다. 이듬해 해체와 함께 궤도를 이탈했다.

신해철의 본격적인 음악 인생은, 뜻밖에 '아이돌'로 시작됐다. 물론 신해철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길은 아니었다. 타의반(?)으로 시작된 신해철의 아이돌 시절은 대단했다. 1990년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안녕'이 담긴 솔로 1집을 발표하며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미소년스러운 외모와, 감성적인 보컬로 많은 여성팬을 사로잡았다. 당시 청춘스타들만 하던 꽃게모양 과자와 신발(랜드**)의 광고모델로도 활약했다.

신해철은 '실력파 아이돌'을 넘어 '시대의 아이돌'로 성장했다.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한 솔로 2집 'MY self'로 뮤지션 신해철의 힘을 보여줬다. 신해철 솔로 2집은, 국내 최초의 미디 음반이다. '재즈카페'와 '나에게 쓰는 편지' 등을 통해 신해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피력했다.

▲ 故 신해철(방송캡처-앨범재킷)
▲ 故 신해철(방송캡처-앨범재킷)

신해철의 아이덴디티는 역시 '록'이었다. 신해철은 92년  록밴드 넥스트(N.EX.T)를 결성, 93년 1집 'HOME'(인형의 기사, 도시인)를 발표했다. 넥스트는 프로그래시브 메탈과 감수성 있는 록발라드 등 다양한 음악으로 가요팬을 사로잡았다. 넥스트는 정규4집까지 별다른 방송없이 히트곡을 배출했다. 특히 94년 발표한 넥스트의 2집 'The Return of N.EX.T Part 1:The Being'는 음악적으로 큰 호평을 얻었다. '날아라 병아리'가 담긴 넥스트 2집은 철학적 가사를 최초로 가요에 접목한 앨범으로 평가받았다.

신해철의 음악은 한 장르에서 그치지 않았다. 영화 음악(바람부는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정글스토리), 전람회 등 후배들의 프로듀싱, 게임음악(아키 에이지), 윤상과 프로젝트 그룹 노땐스 등도 결성했다. 노땐스를 통해 '춤추지 않는 감상을 위한 테크노 음악'을 선보였다.

신해철은 "국내 록시장과 공연 시장의 열악한 구조로 올라갈 곳이 없다"며 97년 12월 31일자로 넥스트 해체를 선언했다. 넥스트 해체에 많은 가요팬들이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신해철은 확고했다. 신해철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남은 넥스트 멤버들은 99년 래퍼 김진표와 노바소닉을 결성했다.

신해철은 테크노에도 열정을 드러냈다. 크롬이라는 이름으로 98년 솔로앨범 '크롬스 테크노 워크'(Crom's Techno Work)를 내놨다. 이듬해 넥스트 4집의 프로듀싱을 맡았던 크리스 샹그리디와 모노크롬을 결성, 동명의 앨범을 내놨다. 밀레니엄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신해철의 음악적 도전은 계속됐다. 키보드 임형빈, 기타리스트 데빈 리와 3인조 비트겐슈타인을 결성,  처음으로 저예산 홈레코딩 앨범을 내놨다. 넥스트와는 확연히 다른 록음악이었다.

신해철은 DJ로도 맹활약을 펼쳤다. 2001년부터 SBS라디오에서 '고스트 스테이션'이란 신개념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신해철이 녹음한 방송을 서버에 올리면 방송국이 틀어주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고스트스테이션은 '고스트네이션' 등으로 조금씩 모양새를 바꿨고, 방송국을 옮겨가며 약 11년간 청취자를 만났다. 2012년 10월 막을 내리기까지 마니아팬을 양산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고스트' 방송을 통해 인디음악의 활성화도 꿰했다. 매주 인디차트를 통해 다양한 인디음악과 뮤지션을 소개했다.

신해철은 2000년대 이후부터 다양한 방송을 통해서도 대중을 만났다. 드라마 '안녕 프란체스카'에 출연했다. '오페라스타, '톱밴드', '이야기쇼 두드림', '라디오밴드', 'SNL 코리아' 등 예능프로그램은 물론, 다양한 '100분토론' 등 시사토론프로그램 등에서도 '마왕'의 저력을 발휘했다. '100분토론'을 통해 최고의 논객, 독설가로서의 명성도 얻게 됐다.

그래도 신해철은 역시 뮤지션이었다. 특히 넥스트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했다. 2004년 넥스트를 재결성했다. 재결성한 넥스트는 전성기 시절의 인기는 회복하지 못했다. 멤버 교체와 불화설 등에 휩싸여 휘청거리기도 했다. 2008년 넥스트의 새로운 3부작 시리즈앨범 '666 Trillogy' 이후 해체 아닌 해체 수순을 밟았다.재즈음악 앨범 'The Songs For the One'을 발매하기도 했다.

신해철의 음악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2014년 6월, 싱글 '아따'를 발표했다. '아따'는 원맨 아카펠라곡으로, 1000개 이상의 녹음 트랙을 제작하고 보컬을 입힌 독특한 노래다. 그리고 6월 26일 유작이 된 솔로 EP '리부트 마이셀프'(Rebood Myself)를 발표했다.(신해철이 참여한 마지막 앨범은 9월 발표한 넥스트 유나이티드의 'I Want It All' 데모)

신해철은 대중성과 실험성을 동시에 실현한 유일무이한 뮤지션이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아이돌에서 청춘의 아이콘,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자신만의 철학으로, 당당하게 세상에 맞섰다. 시대를 관통했던 신해철의 음악과 메시지는 넥스트의 트레이드마크인 '불새'(불사조)처럼 우리 곁에 남았다. 안녕. 영원한 우리의 마왕.

▲ 故 신해철(사진 재즈앨범-KCA엔터테인먼트)
▲ 故 신해철(사진 재즈앨범-KCA엔터테인먼트)
뷰티한국 연예팀 이수아 기자 2sooa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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