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규수 해피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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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그린 국보 180호 <세한도(歲寒圖)>… 한 겨울 엄동설한에도 푸르른 빛을 띠는 소나무 두 그루와 잣나무 두 그루가 초가 한 채와 함께 그려져 있다.

추사 본인이 밝혔듯이 그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의 의리(義理)를 주제로 그린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1944년 말 세한도를 살려낸 서예가 손재형(孫在馨)과 일본인 후지츠카(藤塚隣)의 의리도 그 속에 있으니, 명화 <세한도>에 등장한 네 그루 송백(松柏)은 가히 네 사람에 얽힌 인생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사전에서 찾아 본 의리(義理)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는 뜻이다. 그동안 우리는 ‘의리’를 잊고 살아 왔는지, 아니면 승객들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세월호 선장’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는지 지난해 봄부터 ‘의리(義理)’는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다.

그 의리는 광고시장에서 김보성의 ‘으리’시리즈를 히트시켰다. 그가 CF에 출연해 ‘의리(義理)’를 강조한 발음이 ‘으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두 의리가 있어야 한단다. 이를테면 이렇다. 지난 연말의 크리스마스 트리도 ‘크리스마스 트으리’가 돼야 했다.

김보성 식으로 표현되는 고객에 대한 상품들의 의리는 ‘롯데으리아 햄버거’ ‘너구으리 라면’ ‘포카으리스웨터’ ‘회오으리 감자’ ‘갤럭시 노트쓰으리’ ‘대으리운전’ ‘K쓰으리 자동차’ ‘카카오 스토으리’ ‘이니숲으리 화장품’ 등으로 줄을 이었다.

김보성 역시 ‘숨은 의리남’이었다. ‘으리’시리즈로 인기를 끌기 이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미 그는 누구보다 먼저 1000만원을 유족들을 위한 기부금으로 전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사회와 팬들에게 의리를 보여준 김보성은 ‘일류배우’로 되살아났다. ‘으리’를 말할만한 자격이 있는 ‘대스타’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김보성의 으리’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게 됐다.

의리와 지조는 한국인의 사상적 배경이다. 그래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의리 헌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체 국민에 대한 개인의 도리는, 김보성처럼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忠)이다. 자식의 도리는 효(孝)며, 부부의 도리는 사랑[愛]이다. 또한 선후배지간에는 질서가, 친구사이에는 믿음이 전제돼야 했다. 삼강오륜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의리를 갖자’다.

조선후기의 대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이 같은 ‘의리’를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세한도(歲寒圖)’로 표현했던 것이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 즉 “아주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는 그림이다.

“시련을 겪어봐야 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작품에 담긴 뜻이다. 바로 그의 제자인 이상적(李尙迪)을 두고 한 말이다.

추사 김정희가 권세 있을 때 따르던 이상적은 연유전지군 무가칭(然由前之君 無可稱)이라 하여 가히 일컬을 만한 것이 없어 보였다. 누구나 권력자에게 줄을 대고 잘 보이려고 하다 불리하면 떠나버리는 것이 세상 이치, 즉 이권리합자 권리진이교소(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한(歲寒) 이후에도 이상적은 달랐다. 김정희의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김정희의 아버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을 떠났어도 유배지까지 책과 물품을 보내주는 등 의리를 버리지 않았다. 자칫 역적과 같은 패당이 되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김정희는 이상적의 의리를 세한(歲寒)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松柏)이요, 세한(歲寒)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松柏)이라고 했던 것이다.

우찬제 교수(서강대, 문학 평론가)에 따르면, <세한도>는 이상적이 보관하다 여러 사람들을 거쳐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제대 교수를 지냈던 일본인 후지츠카(藤塚隣)가 소장하게 되었다.

이를 확인한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은 1943년부터 후지츠카를 찾아가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리겠으니 <세한도>를 양도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워낙 세기의 명작인지라 후지츠카는 손재형의 청을 거절한 채 일본으로 갖고 갔다.

1944년 여름 손재형은 노환을 앓고 있는 후지츠카를 찾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매일 찾아가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청하기 시작했다. 손재형의 정성을 본 후지츠카는 그의 맏아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겨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손재형은 그에 만족할 수 없었다. 맏아들과 또 지루한 줄다리기를 할 수도 있어 당신 생전에 넘겨 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이에 감동한 후지츠카는 “선비가 아끼던 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어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으니 잘 보존만 해 달라”는 말과 함께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겨준다.

​아름다운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받아 귀국하고 석 달 후인 1945년3월10일, 후지츠카의 가족이 태평양전쟁의 미국 폭격을 피해 거처를 옮긴 사이 공습으로 그의 서재의 모든 책과 서화들이 불타버렸다.

후지츠카가 심혈을 기울여 모은 그 많은 서화 자료 중에 오직 김정희와 이상적의 사연이 깃든 <세한도>만이 세상에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유홍준의 <완당평전1, 학고재, 2002 참조). 그로써 후지츠카와 손재형이 <세한도>를 가운데 두고 보여준 역사에 대한 의리도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됐다.

이제 2015년이다. 필자는 새해에 2011년에 세운 산업사회에 대한 의리를 완성하려 한다. 당시 서울 지하철2호선을 도는 불법 다단계판매 피해자들과 함께 후세에 전할 명품 직장을 만들기로 뜻을 모은 바 있다.

필자가 그들을 위한 송백이 되고자 결단했듯이, 새해 필자가 그리려하는 <세한도>에 어떤 ‘소나무’를 어떻게 그려 넣을지 이제 먹을 갈고 붓을 들어야 할 때다. 김정희가 겨우 네 그루의 송백을 그렸다면, 필자는 최소한 그보다는 더 많아야 하지 않겠는가.

새해 첫 날 도화지를 준비한 2015년에는 분명 2015년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 확신한다. ■

글_노규수
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 해피런㈜ 대표이사. 2013년 포춘코리아 선정 ‘2013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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