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낙타괴질의 여파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보조판서 문형표 대감. 태조9년(1956년)에 한양에서 태어나 연세대서당에서 서책을 읽었다. 무인년 대종대왕 즉위 해(1998년)에 궐에 들어가 승지원에서 주서로 일하다 혜종대왕 즉위 10개월 후인 계사년 섣달(2013년12월)에 보조판서에 봉해졌다.>
▲ <사진 : 낙타괴질의 여파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보조판서 문형표 대감. 태조9년(1956년)에 한양에서 태어나 연세대서당에서 서책을 읽었다. 무인년 대종대왕 즉위 해(1998년)에 궐에 들어가 승지원에서 주서로 일하다 혜종대왕 즉위 10개월 후인 계사년 섣달(2013년12월)에 보조판서에 봉해졌다.>

[惠宗實錄2] 서역땅에서 출몰한 낙타괴질이 한나라를 침략하고, 그로 인해 네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자 보조판서(保曹判書) 문형표(文亨杓) 대감을 삭탈관직시키고 멀리 귀양을 보내라는 상소가 이어지고 있다. 

녹봉을 축내고 있을 뿐이지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다. 

판서 문형표 대감은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는 물론이요, 나라에 역병이 돌 때 백성들을 피땀으로 돌보던 동(東).서(西) 활인서(活人署)를 모두 동원시켜 위로는 종묘사직의 안녕을 기하고, 아래로는 만백성들을 돌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충신 소리를 듣는 조정 대신들은 물론 잉화도(仍火島)의 일부 대간들은 분조(分朝)만이 종묘사직을 구하고, 만백성을 살리는 길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다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분조는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세자인 광해군에게 스스로 국사를 맡긴 경우여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작금 분조를 입에 담는 것은 자칫 역린(逆鱗)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혜종이 금상에 엄연히 계시고 유월 초닷새 날의 경우 주상께서 동문 근처 내의원(內醫院)에 행차하셔서 낙타괴질을 치료하는 의원들을 친히 접견하신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칫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멸할 수도 있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무릎 쓰고 누가 감히 ‘분조’를 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작금의 난리를 보면... 혜종3년 오월 열 하룻날 처음 한나라에 들이닥친 서역의 낙타괴질은 경기도 평택현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번져나가 충청도 등 하삼도에까지 역병을 퍼뜨리더니 급기야 주상전하의 옥체가 계시는 도성에까지 들이닥치고야 말았다. 

이 같은 난리통에는 당연히 보조판서 문형표 대감이 진압군의 선봉에 서서 목숨으로 낙타 떼를 저지해야 했으나, 그럴만한 기개나 무예도 없이 그저 수수방관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 휘하 장수들마저 오합지졸이었다고나 할까. 

문형표 대감과 보조(保曹)의 대소신료들은 밀려오는 역군(疫軍)의 정체나 규모, 소지한 무기조차 제대로 파악치도 못한 채 허둥거리기 바빴고, 그로 인해 초기 진압에 실패해 역병에 걸려 목숨 잃는 백성이 늘다보니 저자거리의 원성이 궐문을 넘는 불충을 저지르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 <(사진=KBS) : 난세극복의 분조를 이끌 적임자로 저자거리에서 천거되고 있는 징비록의 저자 김상중 대감. 박조4년(1965년) 한양에서 태어나 동국대서당에서 서책을 읽었다. 저자거리 광대로 백성들의 신망을 받더니 금년 2월 한국방송이 징비록을 재편찬하면서 도체찰사에 올랐다.>
▲ <(사진=KBS) : 난세극복의 분조를 이끌 적임자로 저자거리에서 천거되고 있는 징비록의 저자 김상중 대감. 박조4년(1965년) 한양에서 태어나 동국대서당에서 서책을 읽었다. 저자거리 광대로 백성들의 신망을 받더니 금년 2월 한국방송이 징비록을 재편찬하면서 도체찰사에 올랐다.>
처음 낙타괴질이 돌기 시작할 때 보조가 팔도에 써 붙인 방문은 ▷모든 백성들은 낙타와는 상대하지 말고 피하시오 ▷멸균되지 않은 낙타젖 혹은 익히지 않은 낙타고기는 먹지마시오 라는 두 가지 글귀였다. 

하지만 한나라에서 낙타 보기는 나라님 보기만한 일이요, 하물며 낙타젖이나 낙타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청나라 고관대작들이나 먹는다는 연포시(燕鮑翅)를 접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라 하니, 어찌 백성을 괴롭히는 낙타괴질을 잡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판국에 낙타괴질에 걸린 의원(醫員) 한 명이 자신도 모른 채 도성 안의 백성 일천오백 명을 만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대해 한성부판윤 박원순(朴元淳) 대감이 “조정 대신들을 믿을 수 없어 나섰다” 이르고, “그 의원으로 인해 낙타괴질이 도성 내에 더욱 확산될 우려가 있다”고 고하자 백성들 사이에는 “이제부터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며 멀리 탐라까지 피난을 가려는 행렬마저 이어지고 있는 판국이다. 

일이 이러하니 분조(分朝)는 시급한 국사가 됐다. 유월 열나흘 날 혜종이 대국으로 떠남을 기해 분조를 강행, 대국에 ‘원조정(元朝廷)’을 두고 도성 내에 행재소(行在所)를 이끌 소조정(小朝廷)을 두자는 계책이 등장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누가 광해군과 같은 ‘난세의 왕세자’ 역할을 맡을 것인가? 

그에 대해서는 현재 정권을 쥔 남인(南人)은 물론 야인이 된 서인(西人)들 중에서도 마땅한 인물이 없으니 징비록(懲毖錄)을 쓴 김상중(金相中) 대감이 적임자라는 것이 초야 고수들의 의견이라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의해 한양과 개성, 평양의 삼도(三都)가 무참히 함락되고, 함경도까지 적이 침략하여 나라가 위급하게 되자 둘로 갈린 선조의 ‘원조정(元朝廷)’과 광해군의 소조정(小朝廷)을 유성룡이 조정했듯이, 지금은 바로 유성룡의 대역인 김상중(金相中)에게 국난극복의 대권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惠宗三年 乙未 六月六日 弘文館校理命 喝道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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