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惠宗實錄3] “한성부판윤 박원순(朴元淳) 대감을 저지하라” 

자칫 주상 전하의 보위나 김무성 김문수 등 남인 잠룡(潛龍)들의 위상마저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수결(手決)이 없는 그 같은 밀지가 과연 지존의 뜻인지, 아니면 김무성 대감이 이끄는 집권 남인 세력의 중지인지는 모르지만, 영상 황교안(黃敎安) 대감이 품고 떠난 밀서 내용이 그러하다는 풍문이 저자거리에 파다한 상황이다. 

충청도 상인 성완종(成完鍾)의 자살 여파로 63일 천하로 끝난 이완구(李完九) 대감의 뒤를 이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황교안 대감. 

서인들의 잇단 반대 상소를 물리치고, 태평천하 조성의 중임을 맡아 관료 일인자에 오른 그가 유월 스무하룻날 새벽 단기필마로 긴급히 사지아랄비아(沙地亞剌比亞) 사막을 방문, 낙타국 황제에 황급히 예를 갖췄다. 

“한(韓)의 흥망성쇠와 소인의 관운이 모두 낙타국의 처분에 달렸사오니 부디 소인이 품은 밀서의 청을 내치지 말아주시옵소서” 

한나라 조정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낙타국 괴질 진압을 놓고 올린 황교안 영상의 간청이었다. 서인 박원순 대감이 을미지환(乙未之患. 을미년에 일어난 나라의 우환)의 일등공신으로 떠올라 백성들의 신망이 점점 두터워지는 세태를 남인 진영이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황 대감을 향해 “속히 민심을 추스르라”고 명한 성상의 고신과 교지는 공식적으로 혜종3년 을미년 유월 열 여드렛날 오후 청와궁 정전(正殿)에서 내려졌다. 전대의 궁궐인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과 같은 곳이다. 

하지만 그날 문무백관들이 모두 정전에 모일 수는 없었다 한다. 낙타국의 침략으로 경기도 평택성(성주 공재광)이 함락된데 이어 난공불락의 요새로 간주했던 도성 내 삼성의료성(성주 이재용)마저 함락당하는 난리통인지라 부득이 승정원과 의정부의 몇몇 당상관들만 당일 어전에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韓)나라의 대간(臺諫)들이 잉화도에 집결해 황교안 대감의 영의정 천거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중지를 모은 것은 고신(告身)이 내린 날 오전이었다. 서인들은 겉으로 끝까지 반대하는 체 했고, 이를 눈치 챈 남인들이 연명하여 주청올린 결과였다. 

서인 대간(臺諫)들이 조심스레 민심과 낙타국의 눈치를 살핀 연후다. 

서인들로서는 황교안 대감의 영상 취임을 계속 반대할 경우 외침을 막아야 하는 조정의 손발을 묶게 되는 격일뿐더러, 그로 인해 낙타국의 괴질을 막지 못했다는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게 되면, 서인들 또한 그 엄중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염려에 따른 것이었다 한다. 

서인 박원순 대감은 물론 박원순 대감의 전공을 뛰어넘어야 하는 남인의 김무성 대감과도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여야 하는 영상 황교안 대감. 

이래저래 낙타괴질에 따른 종묘사직의 내우외환을 모두 막아야 하는 그에게 어지(御旨)나 다름없는 밀지 전달 세력이 과연 궐내 승지원인지, 아니면 남인인지, 그것도 아니면 박원순 대감의 경쟁자들인 서인 내부의 문재대군(文在大君)이나 안철수 대감 측인지는 알 수 없다. 

아직은 낙타국과의 교전이 삼성의료성과 강동경희성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惠宗三年 乙未 六月二十二日 弘文館校理命 喝道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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