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인 사유의 '중심이동'을 통해 도장깨기에 나서라

철학이란 흔히 존재론(Why, 나는 왜 사는가?), 인식론(What,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윤리론(How,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즉 과학은 유한을 사유하는데 반하여 철학은 무한을 사유하는 셈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황당무계한 무한도전을 좋아한다. 고로 유한한 약물(Drug)이 아닌, 무한한 사회약(Social Medicine)을 개발한 것이다. "어쩌다개발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1995년)는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이다. 1960년대 초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들뢰즈는 철학, 문학, 영화, 예술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저작들을 썼다. 1968년 《차이와 반복》을 집필했고 1981년에는 《감각의 논리》를 저술했다. 미셸 푸코는 "아마도 어느 날 이 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웃게 만들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격노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지닌 농담이다"라고 말했다. <위키백과 참조>
▲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1995년)는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이다. 1960년대 초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들뢰즈는 철학, 문학, 영화, 예술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저작들을 썼다. 1968년 《차이와 반복》을 집필했고 1981년에는 《감각의 논리》를 저술했다. 미셸 푸코는 "아마도 어느 날 이 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웃게 만들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격노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지닌 농담이다"라고 말했다. <위키백과 참조>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으뜸으로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꼽힌다. 주류 철학으로서 이성이 지배하던 시기의 정점에 헤겔이 있다면, 현대 철학에서 도장 깨기를 감행하며 이성을 해체하는 비주류 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이 들뢰즈다.

들뢰즈는 철학사를 면밀히 연구하면서 주류 철학의 핵심 이론을 뒤집는 新개념들을 많이 발명함으로써 푸코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불릴 것'이라고 말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먼저 인상파 화가의 그림은 시간에 따른 사물 이미지의 변화, 즉 사물의 시차적 움직임('時動')을 반복하여 그린 것인데, 들뢰즈는 이것을 <차이와 반복(1968)>이란 책에서 新개념으로 풀었다.

◇ 차이와 반복 

모든 사물이 미립자의 우연에 가득 찬 마주침으로 환원되기에 들뢰즈는 사물의 실체를 설명하고자 특이성과 강도를 강조한다.

즉 사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고유성을 '강도'(Intensity)로 본다. 여기서 특이성은 특정 개체가 현실화되기 이전인 잠재적 상태(발생과정)에서 그와 가까운 지점에서 요동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강도란 잠재적 상태에서 특이성들이 진동하다가 굳어져 현실화될 때 작동하는 힘을 말한다.

한편 헤겔은 부정의 부정을 통한 변증법적 종합(통일)체계를 구축하면서 차이를 중요하게 보았으나, 이는 동일자를 위한 개념적 차이를 확립하는 종속적 차이('종차')일 뿐, 차이 그 자체를 중요시한 게 아니다.

즉 관념철학에서 바깥의 사물이 머릿속에 들어와 형성된 표상은 재현(Representation)이고 재현은 동일성을 의미한다. 재현된 표상이 오성에 의해 바깥의 사물과 똑같이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꽃을 볼 때, '꽃이 이것으로(부정), 이것이 꽃으로(부정)'라는 이성의 메커니즘(질서와 체계)을 통하여 꽃이 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헤겔의 동일성(통일성)을 바탕으로 하는 변증법적 운동을 거부하고, 차이와 반복의 끊임없는 운동을 통하여 동일하게 보이는 사물도 같지 않다고 주장한다.

꽃이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감각(지각)을 통하여 이미지로 찍히기 때문에 물자체인 사물과 인식주체인 나와의 사이인 중간에 이미지가 있고, 그 이미지도 시동(時動)하기에 차이와 반복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는 처음엔 찍히지 않았다가 동일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시차만 있을 뿐인데 반복함으로써 이번에는 찍힐 수도 있다. 고은의 시에 나타나 있듯이 올라갈 때는 없었던 꽃이 내려갈 때는 보이는 이유다.

 

<그 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로 세계에는 동일한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계조차도 결코 동일한 것을 찍어내는 게 아니다. 개념적으로 사과를 말하면 똑같으나, 구체적인 '이 사과'와 '저 사과'는 다르다. 쌍둥이도 다르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다르다. 차이와 반복이 없으면 인간에게 삶이 익어가는 노화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들뢰즈는 헤겔의 동일성 철학을 거부하고 대신 차이와 반복의 사유체계를 세운다.

요컨대, 들뢰즈는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반복을 끼워 넣음으로써 일차적으로 헤겔철학을 해체하였다.

◇ 자본주의: 역동적인 '욕망기계' 

들뢰즈는 관념론의 표상과 유물론의 사물(물자체)의 사이에 이미지가 있다면서 자신의 이미지 철학을 역설한다. 이처럼 관념(이성 주체 의식 표상 등)을 거부하고 감각이나 지각중심의 이미지를 강조하다보니 그의 욕망이론, 즉 고정된 이성이 아닌 역동적인 욕망이나 잠재성을 통한 인간해방은 유물론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이는 인류사의 흐름('이성에서 탈이성으로')과 심궤를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기에 더욱 울림이 크다. 특히 <안티오이디푸스(1972)>와 <천 개의 고원(1980)>은 만족을 모르는 자본의 욕망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인간의 욕망을 문제의식으로 내세운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부추킨 욕망으로 여성의 화장을 들 수 있다. 사실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화장품시장이, 정작 생명을 다루며 천문학적인 R&D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의약품시장을 따라올 만큼 크게 성장하는 이유가 항상 '필요 이상'을 유도하는 자본의 속성을 감안하면 능히 짐작이 간다.

요즘은 여성의 경계를 (욕망이) "가로질러서" 남성용 화장품마저도 인기를 얻고 있는 실정이다. 스마트폰도,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유도된 욕망의 주체는 여성(인간)도, 방송국(광고)도, 모델도 아닌, '알 수 없는 주체'로써 끊임없이 증식하고자 하는 자본 그 자체인 것이다.

오늘날 일상에 침투한 자본의 욕망은, 칸트나 헤겔이 숭배하는 이성적인 주체도, 의식적인 주체도 아니다. 무한하고 획일적인, 이 기계적 욕망을 그는 '욕망기계'로 부른다. 이처럼 新개념들을 쏟아내면서 들뢰즈는 철학계를 쓸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이성이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했듯이, 자본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생각되는 대로 산다'(폴 발레리). 지속적인 사유의 '중심이동'으로 도장깨기에 나서는 당신이 유빕이다.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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