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운명극복’을 노래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당신이 유빕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의 쾌락을 주는 대신 지갑을 털어가기에 다 주는 것 같으나 도로 다 빼앗아 가는 이중 사회다.

들뢰즈는 과거 전제군주 시대를 강도 높은 억압과 통제(超코드화)로 모든 것을 권위에 예속시키는 편집증적 사회로 보는 한편, 현대 자본주의는 기존의 가치와 규범을 무너뜨리면서 등장했기에 脫코드화와 脫영토화에 따른 분열증적 사회로 보았다.

나아가 분열에 의한 역동적 에너지를 다시 시장경제로 포획하면서 再영토화하는 한편, 무한증식을 꿈꾸는 '욕망기계'이자 비인격적인 '기관없는 신체'로 작동하기에 우리는 정신없이 그 왜곡된 욕망에 끌려 다니고 있다고 진단한다.

도장깨기의 일환으로, 일상에서 나타나는 우리 안의 파시즘과 분열증적 사회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자면 원점부터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로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겨 보자.

 

▲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귀스타브 모로 作, 1864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행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니체는 운명을 사랑의 대상인 아모르파티(Amor Fati)로 보고, 운명은 필연이라고 해석했다. 따라서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할 때 인간이 위대해지며,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통과 상실을 포함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동시에 운명에 체념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다음백과 참조)
▲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귀스타브 모로 作, 1864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행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니체는 운명을 사랑의 대상인 아모르파티(Amor Fati)로 보고, 운명은 필연이라고 해석했다. 따라서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할 때 인간이 위대해지며,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통과 상실을 포함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동시에 운명에 체념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다음백과 참조)

 

◇ 오이디푸스 신화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도시 테베의 3대 왕 라이오스(Laios)와 왕비 이오카스테(Iokaste)의 아들이다. 라이오스는 이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신탁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가 태어나자마자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서 키타이론의 산속에 버렸다.

이 아이는 이웃나라인 코린토스의 한 목동에게 건네졌고, 목동은 다시 이 아이를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와 왕비 메로페에게 바친다. 폴리보스 왕은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는데, 발이 부어 있었기 때문에 '오이디푸스(Oedipus: 부은 발)'라고 이름 지었다.

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라난 오이디푸스는 델포이의 신탁소(神託所)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된다'는 신탁을 받고, 그 운명을 피하려 코린토스를 영원히 떠나기로 결심하고 정반대쪽인 테베로 향한다. 방랑자가 된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향하던 중 마차를 탄 노인을 만나게 되고, 사소한 시비가 붙어 결국 노인을 죽이게 되는데, 이 죽은 노인이 바로 친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이었다.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신탁의 절반이 실현된 것이다.

한편 이오카스테 왕비는 테베의 오랜 골칫거리이던 스핑크스를 없애는 자에게 선왕(先王)의 왕위를 물려주고, 그와 결혼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스핑크스가 내는 수수께끼를 풀어 스핑크스를 죽게 한 오이디푸스는 약속대로 테베의 왕이 되었다. 또한 미망인이자 그의 친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낳았다. 델포이의 신탁은 완전히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테베에 역병이 돌아 그 원인을 찾던 오이디푸스는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찾아 복수를 해야만 병이 물러간다'는 신탁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이 곧 자신이며,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고 혼란에 빠진 오이디푸스가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를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목을 매달아 자살한 후였다.

오이디푸스는 당장에 목숨을 끊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눈을 찔러 멀게 하고, 속죄를 위해서 딸 안티고네의 도움을 받아 참회의 길을 떠났다. 이후 그의 자녀들 역시 왕위를 둘러싼 싸움으로 멸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아테네에 도착해 테세우스의 신세를 지면서 복수의 여신들인 에리니에스(Erinyes) 사당에서 지난날의 죄를 깨끗이 씻고, 죽어서는 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고 이 신화를 정신분석과 연계시켰다. 즉 남근기(2세-6세 6개월)의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독점애로 인하여 아버지를 질투하고 배척하여 어머니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 욕망('결핍')을 바탕으로 근친상간과 살해욕망을 가지며, 이로 인해 보복 당할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는 강력한 아버지의 힘에 의해 징벌받을 것이라는 죄책감을 유발시키며, 그 증거로 자신의 성기가 거세될 수 있다는 ‘거세공포’로 인하여 이내 포기하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운데 초자아가 형성되고, 성인 남성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아동의 성별과 상관없이 아동과 부모 사이의 삼각관계를 지칭하는 보편적인 용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라캉은 가족내 삼각관계에서 가장인 아버지를 상징계를 대표하는 대타자로 간주하고 무의식에 언어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의식세계로 전환시키면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지배자의 힘으로 보았다.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의 법이라는 상징적ㆍ언어적 질서로의 편입과정이며, 욕망은 그 속에서 생겨나는 원초적인 결핍이다. 고로 언어질서 속에 기표로 표현된 ‘나’와 실재 인간인 ‘나’의 괴리는 근원적인 결핍과 상실로 나타나고 그 결과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으로 등장한다. 

 

◇ 안티 오이디푸스: 욕망은 결핍 아닌 생산(Infrastructure) 

 

근대는 이성만 남겨 놓고 모두 회의(懷疑)했으나(데카르트의 코기토),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이성마저도 회의함으로써 脫이성, 脫중심주의가 되었기에 이성 혹은 표상이 아닌, 非표상적인 욕망(무의식)의 시대가 된 것이다.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자인 과타리를 영입, 전통적인 정신분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분열분석이라는 신개념을 주창한다. 즉 유물론적 정신의학을 기초로 하는 무의식에 대한 해석인 분열분석에 따르면, 욕망은 욕망적 기계들과 생산의 질서로 구성되는 하부구조(Infrastructure)에 속하기에 결핍이나 충동 등의 관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존재의 생성처럼, 무의식은 늘 자기생산적이며 욕망을 주체로 한다. 특정 조건(형식)하에서 욕망적 생산이 현실화되면 사회적 생산이 된다. 고로 들뢰즈 사유의 진화에 따른 세 번째 명제는 다음과 같다 : 욕망은 결핍 아닌 생산으로 사회구성의 원리다.

이러한 배경에서 들뢰즈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자본권력과 사회구조의 관계를 분석했을 때, 그것이 외려 지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공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국가ㆍ가정ㆍ자본은 지배적 욕망기계로써 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고로 모든 것을 영토화(코드화)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국민은 죄책감과 거세공포에 시달리는 남근기의 아동처럼 분열증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인간 길들이기'를 위한 움직임(動)의 메커니즘으로 영토화ㆍ脫영토화ㆍ再영토화를 구사한다. 예컨대 노예해방(탈영토화: 욕망을 풀어줌)으로 자유인이 된 사람들이 모두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했다(再영토화 : 욕망을 다시 억압함)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분열적 주체'를 역설한다. 이는 유연한 듯 경직된 이중 구조인 영토화ㆍ탈영토화ㆍ재영토화에 굴하지 않기 위하여,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를 부르짖는 니체적 의지의 신들린 열정이나 건전한 광기 등 이성을 통한 해방 보다 무의식의 역동에 희망을 걸어 보자는 말이다.

세포는 하나다. 그 양태에 따라 정상 세포도, 암세포도 된다. 욕망이 그렇다. 고로 들뢰즈는 참된 욕망의 정립(내부혁명 혹은 분자혁명)이 암세포처럼 퍼지며 내재적인 자발적 예속을 초래하는 무의식적 억압체제, 소위 '미시 파시즘'을 타파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견인한다고 본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며 결핍으로 본 라캉(관념론)과 생산으로 맞선 들뢰즈(유물론)의 욕망이론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지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비파시스트적 되기'야말로 미시 파시즘을 타파하는 길이다.

오이디푸스처럼 삶이 그대를 속이고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아모르 파티를 노래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당신이 유빕이다.

 

Amor fati : das sei von nun an meine Liebe!
   운명애 :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지식』1887)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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