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약과 사회약료가 통하게 될 것이라는 꿈과 기대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필자가 황당무계한 무한도전을 좋아하기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약물(Drug)이 아닌, 사회약(Social Medicine)을 이미 5년 전에 개발했다고 이 칼럼을 통하여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며칠 전 국내 일간지의 기사를 통하여, 미국 FDA에서 금년 6월에 한 모바일 게임(인데버RX)을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의 치료제로 공식 승인했다(중앙일보, 2020년 9월16일자)는 내용을 확인했을 때, 마치 필자가 그 제품을 허가받은 것처럼 기뻤다.  

이제 게임이나 앱 등 건강에 도움이 되는 사회약이 학술적인 연구의 세계를 넘어서 정부의 허가를 받고 사회적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약대를 졸업했다고 해서 전통적인 약물체계에만 갇혀 있으란 법은 없다. 현대의료, 즉 기존 의약계에서 그 개념과 이론체계를 외면해왔지만 사회약과 사회약료가 언젠가는 통하게 되고, 후학들이 개별 제품을 만들어 시판하게 될 것이라는 필자의 꿈과 기대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되새겼다. 이내 라캉이 떠올랐다. 

▲ 라캉(Jacques Marie Emile Lacan. 1901~1981)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 라캉(Jacques Marie Emile Lacan. 1901~1981)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 라캉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며 프로이트를 천착한 라캉도 프로이트에 머물러 동화되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여 정신분석의 영역을 문화 전반으로 개방시켰다.  

이 과정에서 정신분석학계로부터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오늘날 현대사상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서 라캉의 존재감은 유감없이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라캉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라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을 문화적 읽기로 재해석하여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정립시켰다. 여기에는 헤겔의 부정의 변증법, 소쉬르의 언어 이론,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등이 필수요소로 포함되어 있다. 고로 라캉은 라캉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라캉의 사유체계는 지속적인 확장과 변화에 의거, 전ㆍ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주저인 <에크리(1966)>가 상징계와 욕망을 중심으로 완성된 시기이다. 전기에서 후기로의 변곡점에서, 즉 언어에서 대상으로 관점이 이동함에 따라, 상상계(장치)에서 실재계(원인)로 진입하게 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서 실제로 하늘이 손바닥 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이처럼 존재하기는 하나 파악이 불가능한 無의 세계가 실재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에서는 실재계와 주이상스(Jouissance. 향유)가 강조된다. 

요컨대 라캉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로는 그 체계(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지만(구조주의), 욕망으로는 가능하다(탈구조주의)는 사실이다. 고로 그는 구조주의자로 불려지는 것을 싫어했고 '정신분석의 윤리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문체는 그 사람 자신이다'라는 경구적 문장으로 시작되는 <에크리>는 낯선 문체, 편집 과정에서 깔아놓은 복선과 함정들에 대한 이해 요구 등으로 인하여 (라캉 스스로도 자신의 저서를 '읽을 수 없는' 저서라고 평했기에) 단번에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하지만 진리에의 열정은 라캉에서 멈출 수 없게 만든다. 다만 몇 가지의 先이해가 필요할 뿐이다. 

 

◇ 자아 vs 주체 : 둘 다 타자의 개입이 관건 

 

근대의 데카르트에게 이성을 가진 자아는 곧 주체였다(이성=자아=주체). 그러나 현대의 라캉은 이를 거부한다.  

중세의 신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이후, 한껏 자유를 구가하며 '나는 나다'라는 이성적 자신감으로 꽉차 있던 인간은 결국 양차대전을 경험하면서 이성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오늘날 인류가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과학기술 중심의 현대의료에 대한 믿음이 한갓 환상이었음을 인식한 것이나 동일하다. 

하루에도 수없이 자유롭게 생각이 바뀌는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보인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배경에서 이성(의식) 보다 욕망(무의식)에 기대를 건 라캉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코기토(생각하는 자아/주체)는 거울상이기에 참된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아는 바깥의 거울에 비춰진 이미지에서 가져온 것이기에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자 없이는 자아를 볼 수 없기에 자아 보다 외려 타자를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이 라캉 사유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라캉이 자아에서 타자성을 발견한 통찰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있었다.  

헤겔에 따르면 최초의 원시인들은 숲에서 갑작스레 마주친 낯선 타자(他者)가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두 원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승자는 주인으로서 군림하지만 패자는 노예의 신분으로 주인을 섬겨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주인이 놀고먹으며 즐기는 동안에 노예는 땀 흘려 일하면서 자연을 정복하고 사물의 이치를 깨우치며 지식을 쌓기 때문이다. 고로 노예가 주인보다 더 주인다운 단계가 온다는 것이다.  

라캉은 헤겔의 관점인 노예의 승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아와 타자가 상호인정을 통하여 주체성을 보여주는 과정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실행하는 존재가 주체인데 그 주체성은 반드시 타자의 매개를 통하여, 즉 타자에게서 인정받아 이름이 불려질 때 성립된다고 보았기에 '나는 나다'라고 해서 자아가 곧 주체는 아님을 주장한다. 예컨대 국회의원 후보가 명함에 목숨을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욕망과 無 

 

들뢰즈의 용어를 사용하면, 라캉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벗어나 칸트가 인식을 포기한 물자체의 원초적 세계 즉 불가능한 대상을 탐구하려고 無로의 탈주를 감행한 노마드다.  

공자는 논어의 자로 편에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다. 

이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같이하지는 않지만 이들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이 군자의 세계이나, 밖으로는 같은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나 실은 화목하지 못하는 것을 소인의 세계로 규정, 대비시켜 군자의 철학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덕목이라고 설파한 것이다.  

이때 和와 同이 같지 않다고 보았는데, 여기서 和는 포용하는 마음을, 同은 남의 비위를 맞추고 동조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군자는 뭇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졌더라도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포용하려고 하지만, 소인은 겉으로는 같은 생각을 가진 것처럼 하며 어울려 다니기는 하지만, 실상은 다른 사람들과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없어 결국에는 화합할 수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생산으로 본 들뢰즈와 결핍을 강조한 라캉, 둘 다 인간의 욕망을 바탕으로 한 존재회복의 화이부동을 입증한 위대한 군자들이니 '유빕!'을 외치지 않을 수 없다.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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