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쳐다보고 현(玄)함을 즐기며 스스로에게 신성한 길을 묻는 당신이 유빕이다.

 ▲부산의 랜드마크인 광안대교의 일출. 그러나 해가 지면 어두운 밤바다 위에서 '빛의 다리'로 변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부산의 랜드마크인 광안대교의 일출. 그러나 해가 지면 어두운 밤바다 위에서 '빛의 다리'로 변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를 통해서만 의미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언어체계로 직조된 사회질서의 상징계를 중심으로 무의식의 3계(상상계ㆍ상징계ㆍ실재계)를 발명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실재계의 무(無)성을 통찰한다.

단언컨대, 우리의 존재는 무(無)화될 때까지 욕망과 충동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자 움직인다(動欲爭).

즉 욕망이 상징계인 기표연쇄망의 내부에서 환유로써 무한궤도를 달린다면, 충동은 실재계에서 상징계(질서)와 상상계(이미지)의 구멍을 통해 자유롭게 넘나드는 대상 a(오브제아)로서의 응시와 조우하면서 우리의 무의식 세계를 반복순환, 사회가 허용하는 보편적인 팔루스(예: 하버드대, 페라리 등)와 그 이상의 주이상스(예: 금지된 사랑, 마약 등)까지도 탐닉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존재'로 몰고 간다(Drive).

고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그 밑바닥을 흐르는 욕망과 충동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로고스적 윤리도, 동시에, 절실하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을 소우주로 본 동양철학에서도 일찍이 인간존재의 무(無)성을 설파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라캉이 발명한 대상 a가 동양철학을 연결시키는 브릿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서울 서초동 누에다리(사진=필자제공)
▲ 서울 서초동 누에다리(사진=필자제공)

 

◇ 천지현황(통찰) : 대상 a의 응시

 

천자문은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한다. 즉 하늘은 현(玄)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늘이 형이상학적이어서 끝없이 크고, 멀고, 깊고, 오묘한 것을 함축하여 표현한 통찰의 결과이다.

필자는 요즘 코로나19로 집 주변을 산책하게 되면서 서초동의 <누에다리>를 자주 건너다니게 되었다. 이 특이한 다리가 2009년에 지어졌으니 새해를 맞아 벌써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누에는 평균 500개의 알을 낳고, 하나의 고치에서1,000~1,500m의 비단실을 뽑을 수 있기에 하늘에서 내려 보낸 천충(天蟲)으로 알려져 있다. 어원적으로 현(玄)이라는 글자가 누에가 뽑아낸 실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 어둡고 깊은 그 속에서 마침내 번데기가 되고 또한 누에나방이 되려고 가물가물한 모습이, 늘 변화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창조되는 오묘하고도 신묘한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하늘의 현(玄)함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천자문이 하필이면 그 첫마디를 천지현황으로 시작하면서 현(玄)을 세상과 우주 소개의 첫글자로 삼고 있다는 점도 현(玄)의 무게를 더하거니와 특히, 노자 <도덕경>의 첫머리인 도(道) 역시 현(玄)함을 설파하고 있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해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름은 이름일 뿐 실재는 아니다. 하늘과 땅이 시작되었을 때는 아무 이름이 없었다. 온갖 사물이 생겨나면서 이름이 만들어졌다. 도의 신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하는 것은 도의 겉모습일 뿐이다. 이 둘은 원래 같은 것인데 달리 표현할 뿐이다. 이 둘이 같은 것을 어둡다고 말한다. 어둡고 어두우니, 이것이 모든 신비로운 것이 들어오고 나가는 문이다.]

우리가 보통 현(玄)을 검을현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 가물(가물) 현에서 유래한 것으로써 안개처럼 "모호한" 것을 일컫는 말이기에 현(玄), 그것은 '경계의 미학'을 의미한다.

요컨대 천지현황을 라캉식으로 표현하면, (상상계와) 실재계가 하늘이고 상징계는 현실 세계인 땅이다. 고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는 대상 a이다. 응시로의 대상 a에 몰입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질 수 있기에,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 패러다임도 시선에서 응시로 바뀔 수 있다. 미술사를 뒤집은 뒤샹처럼.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히틀러 집권 시기에 나치 독일을 지지했던 발언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독일 비(非)나치스화 청문회에서 그의 정부였던 유태인 한나 아렌트의 증언 등으로 처벌을 피했고 이후 5년 동안 학문 활동을 금지당했다.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히틀러 집권 시기에 나치 독일을 지지했던 발언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독일 비(非)나치스화 청문회에서 그의 정부였던 유태인 한나 아렌트의 증언 등으로 처벌을 피했고 이후 5년 동안 학문 활동을 금지당했다.

 

◇ 존재와 시간 : 의미찾기

 

라캉 이전의 하이데거는, 무의식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는 시간성을 통해서만 의미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 결과, <존재와 시간(1927)>이라는 문제작을 저술했다. 그리고 그 역시 존재의 신성한 무(無)성을 통찰한다.

사실 <존재와 시간>은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기에 독일인들도 독일어 번역본이 언제 출간되는지를 묻기도 하고 서울대에서는 고전 필독서의 목록에서 빠지는 등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조금 위험한 표현이긴 하지만, 응시와 시간성을 알면 하이데거 철학(존재론)을 다 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평이다' 그리고, '존재의 의미는 시간성이다'라는 두 개의 명제가 핵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은폐된 본래의 시간을 드러내는 '죽음'(사람들은 생각하기조차 꺼려함)에 주목하고, 현재를 중시하는 대부분의 의식철학이 현전의 형이상학  즉 의식의 시간내재성을 바탕으로 강조한 시선중심의 사유를 해체하면서 응시를 바탕으로 존재와 현존재를 구분, 그 현존재를 주역으로 내세워 미완성의 대하 드라마(제I부 1, 2편)를 연출했다.

미완성 작품인 점에 대하여, 폰 헤르만은 제I부 3편에 해당하는 '시간과 존재'는 <현상학의 근본문제>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제II부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와 같은 저작들에서 수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인간이란 흘러가는 시간에 종속된 존재임을 통찰, 죽음으로부터 역방향으로 응시했기에 <존재와 시간>이 탄생한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기에 늘 불안하고 죽음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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