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존재자 아닌 존재로 대하는 당신이 유빕이다.

 

▲ 횔덜린.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릴케와 첼란과 같은 현대 시인들은 그를 자신들 문학의 선구자로 여겼고,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를 “시인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고귀한 신성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소임이라 보았다. 하지만 반평생을 정신 착란으로 불우한 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대적 시인으로 부활하게 됐다.
▲ 횔덜린.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릴케와 첼란과 같은 현대 시인들은 그를 자신들 문학의 선구자로 여겼고,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를 “시인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고귀한 신성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소임이라 보았다. 하지만 반평생을 정신 착란으로 불우한 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대적 시인으로 부활하게 됐다.

‘신은 죽었다’(니체)와 ‘근대는 존재망각의 시대’(하이데거)라는 명제에서 드러나듯이, 근대는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들의 씨앗을 이미 자신의 몸 안에 가지고 있는바,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은 근대의 완성이 아닌 극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또한 필자의 관점에서 "사태 자체로!"라는 구호를 내건 후설의 현상이 현재중심의 기계적인 시선이라면, "존재가 먼저"임을 주창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미래중심의 역동적이며 창발적인 응시로 명백하게 차별화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하하노'처럼, 한편으로는 후설과 하이데거를, 또다른 한편으로는 니체와 하이데거를 함께 바라보아야 하이데거가 제대로 읽힌다.

특히 근대를 극복하는 사상가로서의 니체가 하이데거에게서는 외려 근대를 강화하고 서양 형이상학을 완성하는 철학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니체가 세계를 '힘에의 의지'로서 기투(企投, Ent-wurf)함에 있어서 단지 서양의 오랜 역사, 특히 근대의 역사는 그것의 가장 은폐된 진행에 있어서 지향하고 있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고로 하이데거는 당대의 니힐리즘은 현대의 특정한 존재 이해, 즉 존재자 전체를 기술문명적 지배의 수단으로 보는 존재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전기의 하이데거는 존재자 전체의 본질을 '힘에의 의지'로 보는 형이상학적 인식에 입각하여 자기 철학을 현존재 중심으로 전개했으나, 1934년 이후부터 나치 운동과 히틀러에 대해서 "이용당했다"는 배신감과 환멸을 느끼게 되고 더 이상 기대를 품지 않게 된다.

(주: 잘못된 결단에 의한 10개월간의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생활은 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망령처럼 그의 남은 생을 따라다녔다).

요컨대 니체의 ‘힘에의 의지’도 과학기술문명을 근저에서 규정, 권력을 옹호하는 맹목적인 지배의지로 해석하면서, 당시의 나치즘도 자유주의나 볼셰비즘 못지않게 이러한 맹목적인 지배의지가 자기 확장을 위해서 사용하는 세계관으로 간주한다.

결국 하이데거는 이러한 통찰에 의한 '전회'(사상적 전향)를 통해, 이때부터 오직 횔덜린(Friedrich Holderlin. 1770~1843)만이 현대 기술문명을 극복하는 참된 방향을 제시하는 시인으로 보고 자연에 귀의한다.

 

◇ 존재 이해 : 시간이 지평이다 

 

인간은 이 세계라는 무대에서 시간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없다가ㅡ있다가ㅡ없어지는" 무유무(無有無)의 현상, 곧 시간의 동적(動的) 구조(지평)를 드러내는 존재다.

고로 하이데거의 존재물음도 이 세계 내부에 내던져진 피투성이의, 시간성에 바탕을 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환원된다. 여기서 의미란 "그로부터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게 되는 기투의 기반"(또는 목적)이고, 기투란 미래를 위하여 자신을 내던짐을 의미한다.

예컨대 내가 세계를 둘러보다가 참새를 발견, 고정하여 보고 생각한다 : '저게 뭐지?' 이처럼 은폐(그동안 망각되어 보이지 않음)와 脫(탈)은폐(마침내 눈에 보임)의 가역적운동이 세계-내-존재의 현존재가 가지는 심려의 핵심 메카니즘이다. 이때 심려의 대상이 사물이면 배려, 타자이면 염려다.

고로 존재의 존재 의미는 시간성이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는 우리가 직접 알 수 없기에 존재를 가장 잘 이해할 가능성이 바로 시간성에 있기 때문이다.

외람되지만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할 때, 필자의 존재 의미는 사회약료의 개시(開始)에 있다. 즉 "인류를 아름답게, 사회를 건강하게"(인아사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과학기술중심의 현대의료에 저항하며 이를 극복하고자 완성시킨 <사회약료>의 저작을 들 수 있다: '약물보다 사회약이 먼저다.'

 

▲ 2014년9월 서울대학교가 출판한 필자 한병현 저술의 <사회약료와 보건의료체계. Therapy of social medicine & health care system>.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읽히고 있는 한류 건강의료서로서 기존 의료체계의 개혁을 선도한다는 평이다. 인문·사회과학적 ‘Deep & Wide’(본질은 깊고, 영향력은 넓은)의 시각을 바탕으로, 먼저 사적인 영역에서 인간이 ‘약 의존적 존재(homo medicus)’임을 밝히면서 유사 이래 지속되어 온 약물의 독점체계를 극복하고자 새롭게 사회약(Social Medicine)을 주창하며, 그 방법론으로 사회약료(SM Therapy)를, 각론으로 미소약학을 깊이 있게 소개하고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 2014년9월 서울대학교가 출판한 필자 한병현 저술의 <사회약료와 보건의료체계. Therapy of social medicine & health care system>.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읽히고 있는 한류 건강의료서로서 기존 의료체계의 개혁을 선도한다는 평이다. 인문·사회과학적 ‘Deep & Wide’(본질은 깊고, 영향력은 넓은)의 시각을 바탕으로, 먼저 사적인 영역에서 인간이 ‘약 의존적 존재(homo medicus)’임을 밝히면서 유사 이래 지속되어 온 약물의 독점체계를 극복하고자 새롭게 사회약(Social Medicine)을 주창하며, 그 방법론으로 사회약료(SM Therapy)를, 각론으로 미소약학을 깊이 있게 소개하고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백신이나 치료제의 약물(Drug)보다 사회적 거리, 마스크, 손 씻을 물 등의 '사회약'(Social Medicine)이 COVID-19의 팬데믹 상황에서 지구촌의 우리 모두를 구원하고 있는, 진정한 약(Medicine)임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다. 

이는 피투성이인 필자가 나름대로 이번 생의 일생(一生)을 '일상성'에 바탕을 두고 사회약료에 기투했기에 가능한 사건이다(하이데거 역시 '일상성'에서 출발, <존재와 시간>을 내놓았다).

이처럼 시간성이란 시작과 끝이 있기에 제한적이므로 존재는 죽음을 통하여 시간성에 개입한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의 구조를 과거/피투(被投), 현재/몰입(沒入), 그리고 미래/기투(企投)로 밝힌다. 

즉 세인(世人)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현재에 몰입, 호기심ㆍ잡담ㆍ애매성에 빠져 비본래적 시간을 보냄으로써 시간에 휘둘려 자기 망각의 삶을 사는 반면, 현존재는 죽음의 응시를 통해 과거부터 지금까지 있어왔음('旣在性')을 눈앞에 떠올리는('현전화') 한편,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투하며 본래적 시간을 사는 주체가 되면서 현재를 의미있는 '순간'으로 경험, 이를 반복한다.

고로 시간이야말로 현존재의 존재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내는 지평이다.

<존재와 시간>은 현존재의 존재인 세계-내-존재의 계기들을 묘사한 후, 후반부에서 마침내 현존재의 동적인 근본 구조인 시간성으로 환원되어 간다. 결국 존재의 의미는 의식철학이 말하는 시간내재성에 의거한 현재 중심의 주관적 시간이 아닐 뿐만 아니라, 바깥의 물리현상이 말하는 객관적 시간도 아닌, 그 "사이"의 시간에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즉 현존재만이 과거(기재)ㆍ현재(순간)ㆍ미래(장래)를 하나로 융ㆍ복합화하여 "탈자적(脫自的) 통일"을 이룸으로써 그 고유한 실존의 의미를 구체화시킨다고 보았다. 이처럼 하이데거의 시간 및 인간관은 선형적이고 인과론적인 시간관을 해체하고 새롭게 구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Rx : 현존재의 선구적 결단(미래 중심)

 

죽음은 실존의 전체성을 언박싱하는 컷터칼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는 시간의 유한적 속성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고로 인간이 죽음을 앞당겨 사유할 수 있음은 명백한 축복이다. 세인이 아닌 현존재는 죽음의 응시를 통하여 본래의 실존 혹은 실존의 본래성을 통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서 사르트르가 노벨상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도 실존의 본래성이 훨씬 더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는 세인이 아닌, 현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으로 남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특정한 대상이 있는 공포와는 달리, 세계-내-존재로서 세계의 무성(無性)에 기인하여 불현듯이 찾아오는 불안(라캉식으로는 무의식적 죽음충동의 응시)과 시간성이라는 동적 구조에 의해 포획된 마음씀은 현존재로 하여금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선구적 결단을 촉발하여 '되어감'(유의미한 과정)을 만들어가도록 이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우리에겐 죽음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가 세계와의 만남 그 자체가 피투성이의 존재론이고, 상호 맥락과 관계의 열어 밝힘은 인식론이다. 세계성은 유의미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는 "대개 이미" 주변세계와 친숙하다. 열어 밝혀져 있는 이 세계에 우리가 친숙해져 있기에 낯섦도 생긴다.

즉 친숙함이 먼저 존재하기에 세계-내-존재의 이해는 이 세계를 통한 '자기 이해'로써 여기에는 시간을 지렛대로 삼아 반성과 저항을 통해 자신도 넘어설 수 있는 사필귀정의 실존이 포함된다.

'현존재는 우리에게 존재적으로 가장 가깝고, 존재론적으로 가장 멀리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현존재가 거기에 있음으로써 이 세계 안에서 '일상성'을 바탕으로 존재물음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자인 동시에 자기의 존재 이해를 갖고 있는 탁월한 존재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래성'으로 후설을 비판하고 넘어서는 유명한 명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는 현상학적 기술(Description)로 나가지 않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인식(기술)이 아닌 존재다. 인간이 코기토(사유 주체)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가장 멀다. 즉 인간은 존재하나, 존재론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존재('되어감')이지 완성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현상학적 기술이 아닌, 해석학적으로 먼 길을 돌아가는 과정적 존재임을 강조한 말이다.

그 결과, <존재와 시간>의 제II부(미완성)에서 다루고자했던 것이 존재자보다 앞서 있는 존재(無) 자체가 주는 시간성, 바로 "존재의 시간" 혹은 '운명'(예: 하늘의 존재 계시인 태몽-생(生), 유성-멸(滅) 등)에 대한 논의까지도 가능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으나, 후기의 하이데거는 전회 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존재의 은둔지인 자연으로 도피하여 시인이 되었다.

요컨대 하이데거 철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상상이 개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럼에도 운명의 장난처럼, 하이데거는 존재의 시간을 통하여 태몽ㆍ유성 등 비트겐슈타인의 '신비로운 세계' 혹은 동양철학의 핵심 주제들을 만나,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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