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불법 다단계판매 추방 시민운동’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자본주의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홍익인본주의’라 부르기로 했다. 또한 새로운 자본주의라면 적어도 기존의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제4의 자본주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작 시민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라니 가당치도 않다고 할 고관대작도 있을 것이고, 경제학을 공부하신 서생들이 들으면 돈키호테의 ‘캄포의 풍차 찌르기’식의 무모한 도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 지구라는 동물원에서 인류학이나 사회학을 공부하신 박사님들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혀를 끌끌 찰 수도 있다.

당연히 그들이 하는 평가가 일리가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를 염려하는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도전을 할 때면 늘 기득권 세력과 싸워야 하는 일인데, ‘낡은 자본주의 타파’라는 슬로건을 내건다면, 우리가 말하는 부패하고 낡은 기득권층의 반격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가장 큰 이슈를 양산했던 우리 사회의 아젠더가 ‘경제민주주의’였고, 박근혜 당선자의 공약 역시 ‘부자 프렌들리’가 아닌 ‘서민 프렌들리’였기 때문에 홍익인본주의라는 제4의 자본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생태적 환경은 그 어느 정권, 그 어느 때보다 좋아졌다고 보여 진다.

일단 용어상의 정리부터 해야겠다. 홍익인본주의(弘益人本主義)는 보수자본주의 또는 기존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신자본주의 시스템의 표현이다. 흔히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신본주의(神本主義)에 대한 대립적 개념으로 보지만, 우리가 말하는 인본주의는 자본주의(資本主義)에 대한 대립적 개념이다. 해처럼 세상을 환하게 밝혀서 인간세상의 삼라만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배달국의 개국이념과 환웅천황의 통치이념을 앞에 넣은 것은 현재 정치권에서 거론하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보편적 복지나 상생(相生)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에서 우리의 인본주의가 신본주의와의 차별화가 아니라는 말을 했는데, 우리는 오히려 인본주의를 보다 확고히 정착시키기 위해 신(神)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진정 신이 죽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 부처님의 자비와 박애는 물론 공자·맹자·순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가르침이 현대적으로 다시 태어나 우리 사회의 독점적이고 지배적이며 계급적인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를 일깨워 그들조차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또한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규범에 의한 계층은 인정하지만, 그 계층의 상위층이 부(富)를 독점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분명한 개선이 있어야 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그래서 필요하다.

따라서 홍익인본주의의 실천과제는 기본적으로 부(富)의 피라미드 구조의 변혁에 있다. 피라미드 한 면은 상위 꼭지점과 하위 밑변의 양쪽 끝이 직선으로 연결된 삼각형 구조다. 삼각형의 면적을 결정짓는 두 개의 요소가 밑변의 길이와 상위 꼭지점에 이르는 높이일진데, 밑변의 존재를 무시하고 상위 1%의 소수 꼭지점이 ‘부(富)와 기회의 면적’을 독점하는 현상은 분명히 개선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인구는 5000만 명이다. 그 5000만 명의 상위 꼭지점 1%를 차지하고 있는 50만 명의 VIP, 더 나아가 0.1%를 차지하는 5만 명의 VVIP에 대해 인위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제도적으로 그들의 재산을 강제 환수하자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공산주의적인 발상이고 체제부정이다. 또한 상위 1%의 노력과 공적, 역할과 기능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 발전을 후퇴시키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따라서 홍익인본주의가 추구하는 ‘자본으로부터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하위 밑변에 깔린 사람들에게 최상위 꼭지점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즉 기회균등의 원칙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노력하면 1등이 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제 다시 개천에서 용(龍)이 나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견고한 피라미드 구조의 아성을 깨자는 주장은 홍익인본주의 만이 아니다. 서울시립대 이근식 교수는 상생자유주의를 제기하면서 교육과 상속의 기회균등을 말했고,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동반성장론을 제기하면서 초과이익공유제를 말했다. 그 외에도 많다. 그 모두 ‘자본이 주인인 자본주의’의 구조를 ‘인간이 주인인 홍익인본주의’의 구조로 바꾸자는 취지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나는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존중해왔다. 지난 2010년1월초 우리나라의 삼성전자가 일본의 자존심이자 먹거리였던 소니, 파나소닉, 샤프, 히타치, NEC 등 9개 전자회사의 연간 매출액과 영업이익(2009년)을 앞질렀다는 발표가 났을 때 나는 얼마나 가슴 뿌듯했는지 모른다. 이어 한 달 뒤인 2010년 2월 김연아 선수가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나는 정말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었다.

하지만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2011년 2월24일 기업의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초과이익공유제를 거론하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라고 맞받아쳤을 때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 국민이 열광하고 응원했던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삼성’과 ‘이건희 대표선수’가 ‘밑변’들이 들으면 섭섭할 수도 있는 말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내가 국가나 동족에 대한 맹목적 응원을 하는 일그러진 민족주의자가 되는 순간이고, 편협한 국수주의자에 불과한 소인배로 전락되는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성경을 읽으며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를 해석하지 못한 때가 있었다. ‘가난(poor)’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분명 마음 씀씀이가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그래서 속 좁은 이기심에 싸움질이나 하는 하급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만 했다.

나 말고도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이 과거에도 있었던지 독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마음이 가난한 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첫째, 욕망(慾望)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였다. 둘째, 소유(所有)로부터 자유로운 자였다. 셋째 (죄가 없어)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였다. 그들은 마음의 가난(poor)을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배부르게 채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홍익인본주의를 추구하면서 마음이 가난해지기로 했다. 그것이 행복을 향해 달리는 해피(happy) 런(run)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시민운동 동료들이 뜻을 한 곳에 집중시키기로 행복결의(幸福結義)한 날이,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초과이익공유제 발언 40일 만인 2011년 4월5일이었다. 마치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桃園結義)하듯이 그날 우리는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우리는 지금 홍익인본주의의 만세를 부른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을 때, 그리고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와 같이 홍익인본주의에 동참하는 회원이 단 한 사람이라도 증가하면 우리 모두는 만세를 부른다. 자본주의의 개혁은 결코 상위 꼭지점이 아닌, 마음이 가난한 하위 밑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세!!
  

노규수_ 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 해피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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