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적 결정불가능성의 해체를 확인하는 당신이 유빕이다.

 

▲ 플라톤(Plato. B.C.427~B.C.347).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다. 기하학을 중시하였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많은 철학자와 수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예를 들어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진리는 공 모양의 지구 위에서 현실로 존재할 수 없지만, 원형의 삼각형을 ‘이데아(idea)’로 규정하고, 그 ‘원형과 본질’을 찾는 과정을 철학적 과제로 생각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오늘날까지 서양 사상을 지배해온 인물로 평가받는다.
▲ 플라톤(Plato. B.C.427~B.C.347).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다. 기하학을 중시하였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많은 철학자와 수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예를 들어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진리는 공 모양의 지구 위에서 현실로 존재할 수 없지만, 원형의 삼각형을 ‘이데아(idea)’로 규정하고, 그 ‘원형과 본질’을 찾는 과정을 철학적 과제로 생각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오늘날까지 서양 사상을 지배해온 인물로 평가받는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2-2004)는 창의적 사고와 문자學(에크리튀르 과학 혹은 그라마톨로지)을 바탕으로 신조어와 여러 가지 현대적인 유행어들을 만들어냈다.

이는 로고스ㆍ진리ㆍ본질ㆍ원본ㆍ동일성 등으로 구축, 체계화된 음성중심의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적 글쓰기와 읽기를 역설하면서 얻은 열매들이다.

특히 데리다는 의미 이해와 기호 교환은 닫힌 체계가 아니며 열린 체계이고, 거기에는 의식과 무의식 등의 고정된 위계나 질서가 없다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 디페랑스)이라는 신개념을 만들어 낸다: '(이데아 같은 순수한) 원본은 없고, 동일성이 아닌 ‘차연’만 있다.'

어원적으로 ‘차연’이란 차이와 지연의 합성어로, '완성 없는 진행 중(ing)의 차이'를 뜻한다. 고로 ‘차연’은 현재 속에서 배제되거나 부재하는 타자들이 현재의 가능성을 구성하면서 남기는 차이와 지연의 흔적(trace)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질 중심의 철학자인 플라톤과 칸트를 해체하면서 데리다가 새롭게 확장한 개념으로 사용하여 철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친 파르마콘과 파레르곤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 파르마콘

 

파르마콘(pharmakon)은 약물, 약품, 치료, 치유, 독, 마술, 물약 등의 모순되는 여러 의미를 갖고 있는 그리스어이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글은 파르마콘 즉 망각의 치유나 치료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예시하듯이 그것은 또한 위험한 약물이기도 하다. 양날을 가진(double-edged) 말인 파르마콘은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a or b)의 이항대립 논리가 이것도 저것도(both/and)의 논리에 의해 명백히 전복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문제는 양약(良藥. 치료제)으로서의 파르마콘을 독약(毒藥)으로서의 파르마콘과 간단히 그리고 완벽하게 분리해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처럼 <플라톤의 약국(Plato's Pharmacy)>에서 파는 파르마콘을 상기할 때, 데리다는 '만약에 글쓰기가 더 이상 철학적 진리를 향한 관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글쓰기는 독약일 뿐 아니라 하나의 오락, 훈육, 그것도 나쁜 오락이 될 것'이라는 플라톤의 생각을 제시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상반된 두 세계를 화해시키려한 것이다.

 

▲ 사형을 언도받고 독배를 마시기 직전 ‘악법도 법’이라며 법의 본질을 말하는 소크라테스를 표현한 그림. ‘테스형’ 소크라테스는 평소 말(언어)이 문자보다 우월하다는 의견을 제자들에게 피력했다고 데리다는 소개한다.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면 ‘카톡(문자)’이나 ‘전화(음성)’ 중 어느 것이 더 진정성을 갖느냐는 의사소통의 본질 문제와 비교될 수 있다. 문자로 보낸 안부가 때론 무성의하다는 독으로 작용될 수 있듯이, 질병치료를 위해 투입된 약(medicine)이 인체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사회약료(social medicine)’의 시각이다.
▲ 사형을 언도받고 독배를 마시기 직전 ‘악법도 법’이라며 법의 본질을 말하는 소크라테스를 표현한 그림. ‘테스형’ 소크라테스는 평소 말(언어)이 문자보다 우월하다는 의견을 제자들에게 피력했다고 데리다는 소개한다.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면 ‘카톡(문자)’이나 ‘전화(음성)’ 중 어느 것이 더 진정성을 갖느냐는 의사소통의 본질 문제와 비교될 수 있다. 문자로 보낸 안부가 때론 무성의하다는 독으로 작용될 수 있듯이, 질병치료를 위해 투입된 약(medicine)이 인체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사회약료(social medicine)’의 시각이다.

 

고로 글쓰기의 파르마콘은 기억을 보조할 수도 있고 삭제할 수도 있다. 글쓰기란 기억의 방편인 동시에 망각의 방편이기도 하다. 파르마콘의 의미와 가치는 결정불가능성의 경험을 수반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나아가 데리다는 중추적 용어인 대리보충(supplement), 산종(dissemination) 등의 해석을 통해서도 파르마콘의 이중성에 주목했다. 이처럼 데리다의 해체는 대부분 대립적으로 등장한다.

요컨대 파르마콘은 이중적이고 애매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에서 일직선상의 일목요연한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 파레르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아름다움(美)의 대상으로서 예술 작품을 본질인 에르곤(ergon)과 부수적인 파레르곤(parergon)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파레르곤은 파(par)와 에르곤(ergon)의 합성어로 파(par)는 "본질에서 떨어진"이란 뜻이다.

특히 미술작품이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는 경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칸트에 따르면, 파레르곤으로서 액자는 그림의 본질적인 에르곤의 나머지 부분이거나 이차적이고 보충적인 잉여의 산물이 될 뿐이다.

또한 액자의 존재는 에르곤의 내부 스스로가 충만함 또는 완성을 통해 자신을 한정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반증으로 보았다.

반면에 데리다는 파레르곤을 에르곤의 외재적 잉여가 아니라 에르곤과 구조적으로 연결되는 하나로 파악한다.

파레르곤으로서 액자는 에르곤으로서의 그림이 지닌 내재적 결핍이나 부족을 상호 보충해주는 대리물이 되기 때문이다.

즉 에르곤은 자신의 작품내부를 완성하기 위해 파레르곤의 기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파레르곤은 에르곤이 없다면 그 자신은 공(空)과 같은 무(無)의 존재가 된다.

요컨대 액자는 의식의 뒤편에 (무의식으로) 존재하기에 칸트적 의미의 경계라기보다는 경계가 해체된 상호의존적 등가물인 것이다.

오늘날 모든 대상이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따라 예술 작품도 이에 편입되기 위해 무시되고 배제되어 무의식에 머물렀던 파레르곤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존재와 무의 텍스트에서 모순적 결정불가능성의 해체를 확인하는 당신이 유빕이다.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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