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H 인터뷰] '그대로 괜찮다' 서호성 작가의 그림이 전하는 조용한 확신

작가 서호성이 말하는 관계, 색, 그리고 ‘괜찮다’는 용기

2025-11-26     박솔리
서호성 작가/ 사진= 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뷰티한국 박솔리 기자]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빨라 한 번쯤 숨이 가빴던 사람이라면, 서호성 작가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디자인과 마케팅을 공부하며 가장 앞에서 트렌드를 추적하던 시절. 누구보다 빠르게 변화를 읽어야 했고,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끝없는 경쟁 속을 달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빠른 세상의 속도에 맞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조용히 마음 한가운데 놓였다. 그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아 떠난, 서호성만의 그림 여행이다.

파리에서 깨어난 프렌치 감성과 잠들어 있던 예술 세포들

작가의 예술 세계를 말할 때 파리에서의 7년은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패션디자인과 마케팅을 전공하며 보낸 그 시간 동안,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낯선 조화 속에서 잠들어 있던 예술적 세포들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서호성 작가에게 파리는 단순한 유학지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각도로 확장된 곳이다. 거리의 색, 사람들의 태도,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풍경이 모두 현재 작업의 원천이 되었다. 작가가 말하는 ‘프렌치 감성’은 단지 스타일이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가깝다. 예술을 대하는 여유,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인생을 통째로 조망해보려는 마음이 그 감성 안에 배어 있다.

‘나와 나’,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로 확장되는 감정의 지도
작업은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처음엔 ‘나와 나’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 늘 누군가의 ‘누구’로 불리며 살아가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은 공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 안에 숨어 있던 수많은 ‘나’를 마주하는 과정이 시작됐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첫 ‘감정 시리즈’다. 이후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관계로 확장된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복잡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화합, 그리고 그 끝에서 비로소 다가오는 치유와 이해의 순간. 이 여정이 작품 속에 켜켜이 담긴다.

감정과 관계에 초점을 맞췄던 시리즈가 충분히 쌓이자, 어느 순간 작가의 시선은 한 발 더 물러선다. 제3의 관찰자가 되어 인생을 조망하는 ‘인생 시리즈’로 작업이 발전했다. 구상과 추상이 교차하는 화면 위에서 인생은 다시 구성되고, 관객은 마치 먼 발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감각을 마주하게 된다.

서호성 작가/ 사진= 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
서호성 작가가 특히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인생은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비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이 말처럼, 인생을 너무 가까이에서만 보면 매 순간이 버거운 비극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면, 그 복잡했던 시간들이 예상 밖의 단순한 의미로 정리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 시선을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오늘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잊고 사는 많은 이들에게, 잠깐이라도 자신의 삶을 떨어져서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인생의 해답은 거대한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예상 밖으로 단순한 데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조용히 환기한다.

[Friends 프렌즈 50-02] 91x117cm / oil on linen / 2023 [Amoureux 연애중] 45.4 x 33.4 cm / oil, oil sticks on linen /2022

창작의 고독을 견디게 하는 단 한 번의 공감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결과만 화려해 보일 뿐, 그 과정은 철저히 혼자 견디는 시간의 연속이다.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실패하고, 다시 그리는 일.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구간이다.
서호성 작가에게도 가장 고독한 시간은 바로 이 모든 과정을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순간들이다. 그럼에도 다시 캔버스 앞에 서게 만드는 힘은 의외로 단순하다.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울림으로 도착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때의 공감이 고갈된 에너지를 다시 채워 넣는다. 한 마디의 진심 어린 피드백, 오래 작품 앞에 머무르는 관람객의 뒷모습, 그 모든 장면이 작가를 다음 작업으로 이끈다.

정답 없는 긴 여행, 불안 대신 호기심으로
그가 바라보는 인생은 ‘정답 없는 긴 여행’에 가깝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고, 누구도 완벽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어차피 맞닥트리게 될 불확실한 미래라면, 불안함 대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느라 지치기보다는, 지금의 자신을 먼저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과 결과의 무게감을 좇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순간들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싶어 한다.

최근 작업의 중심에도 이러한 질문이 놓여 있다. 인생의 매 순간 앞에서, 세상이 정해 놓은 행복의 기준을 추앙하기보다 ‘가장 나다운 해답’을 찾아가는 것, 그 여정이야말로 인생 그 자체가 아닐까라는 물음이다. 우리 모두 이번 생은 처음이라, 여정이 낯설고 서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찬란하고 소중하다고 작가는 믿는다. 세상이 원하는 완벽한 모습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조금 다른 시선으로, 각자의 기준으로 행복을 정의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작품 속 색과 선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관람객이 자신의 작업을 통해 어제의 나를 돌아보고, 오늘의 나를 솔직하게 마주하며, 내일의 나를 조심스럽게 꿈꾸는 시간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플러스(+) 기호와 겹겹의 색이 상징하는 것들
서호성의 작품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주 등장하는 상징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플러스(+) 기호다. 이 기호는 분명 종교적 의미를 품고 있다. 동시에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조용한 응원의 사인으로 화면 곳곳에 놓인다. 인생의 굴레 속에서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묵묵히 곁에 서 있는 존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상징 속에 담겨 있다. 또 한 가지, 많은 관객들이 가장 먼저 언급하는 요소는 컬러다. 작품 속 강렬하고도 다양한 색채는 단순한 미적 장식이 아니다. 복잡 미묘하게 변하는 인간의 감정, 예측 불가능한 인생의 궤적을 상징한다. 때로는 충돌하듯 대비되는 색의 조합은,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사건과 감정이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의미를 드러내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닮아 있다.

‘완성’은 작가의 몫이 아니라 관람객의 공감에서
창작자에게 ‘완성’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낯설다. 서호성에게도 마찬가지다.한 번 마무리한 작품을 다시 보게 되는 순간마다, 어딘가 늘 부족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작품의 완성이라는 개념을 작가 자신이 아닌, 관람객의 공감에 두게 되었다. 어떤 이가 자신의 삶을 투영해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르고, 누군가는 캔버스 속 장면에 위로를 받았다고 이야기할 때, 그때 비로소 한 작품이 조용히 완성된다고 느낀다. 결과물 중심의 세상에서, 완성의 기준을 작가가 아닌 관람자로 옮겨두는 태도에는 ‘관계’와 ‘소통’을 최우선으로 두는 서호성의 철학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Avec toi 너와 함께] 162x112cm / Acrylic, oils ticks, collage on linen/ 2021
[Avec toi 너와 함께] 162x112cm / oil, oil sticks, collage on linen/ 2023

대표작 ‘너와 함께’에 담긴 믿음과 의로움의 메시지
대표작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서호성은 100호 캔버스로 작업한 ‘너와 함께’ 시리즈 두 점을 떠올린다. 인생의 매 순간, 누구나 크고 작은 고민의 굴레 속을 통과한다. 그때 필요한 것이 꼭 많은 이들의 응원 일까.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묵묵히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우리는 다시 꿈을 꿀 수 있다.” ‘너와 함께’에는 세상이 요구하는 결과의 무게감 대신, 의로움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의 소중함에 감사하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작품과 깊이 맞닿아 있는 한 구절이 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Isaiah 41:10 (NIV)
"So do not fear, for I am with you; do not be dismayed, for I am your God. I will strengthen you and help you; I will uphold you with my righteous right hand."

이 구절처럼, 그림 속에는 삶의 버거운 무게 앞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흐른다.

계획을 정해두지 않는 용기, 우연과 만남에 자신을 맡기다
앞으로의 계획을 미리 단단하게 정해두는 편이 아니다. 인생이 예측 불가능하듯, 새로운 만남과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 그리고 예기치 않은 프로젝트들이 자연스럽게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리라 믿는다. 그래서 지금도 담담하게, 그러나 진심을 다해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작가가 다루는 주제는 ‘사람’과 ‘삶’이라는 다소 무거운 축에 놓여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은 가볍고 유쾌한 리듬을 지향한다. 너무 비장하거나 과하게 심각하지 않게, 그러나 충분한 무게감으로 소통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바람을 자주 언급한다.

서스테이너블 K-패션 아트쇼, 테이스트오브그린에서 얻은 신선한 자극
그동안 작가의 활동은 주로 개인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번 서스테이너블 K-패션 아트쇼와 DDP 테이스트오브그린 초청은 다른 작가들의 작업과 한 공간에서 호흡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였다. 전시장에서 마주한 수많은 작품들은 작가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속가능성과 패션, 예술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의 세계를 보는 일은, 스스로의 작업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 되기도 했다.

“나는 유쾌한 염세주의 작가”
인생의 어두운 면을 모른 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기에만 매몰되지도 않는 태도. 염세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단면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위를 유쾌하게 건너가는 법을 배우고 또 나누고자 하는 마음. 그 균형 위에서, 서호성만의 색채와 선, 그리고 플러스(+) 기호는 오늘도 또 하나의 인생 이야기를 캔버스 위에 써 내려가고 있다.

Editor’s Say
서호성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생이란 단어가 한층 다른 온도로 다가온다. 완벽을 향해 달리던 사람이 멈춰 서서 ‘나’라는 존재의 결을 다시 어루만질 때, 그 고요한 순간에서 피어난 색채는 눈부시도록 인간적이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균열을 감싸는 언어다. 서로의 다른 색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조화, 불완전함을 끌어안은 선의 흔들림, 그 모든 것이 결국 “괜찮다”는 말로 귀결된다.

혹시 우리도 너무 오래 달려오느라, 스스로를 잊은 채 살아온 건 아닐까.
서호성 작가의 색은 말없이 속삭인다.
“조금 느려도 괜찮아. 네 속도의 인생도 충분히 아름답다.”
오늘, 그의 작품이 당신의 하루에 작지만 깊은 플러스(+) 하나로 남기를.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자신만의 색으로, ‘너와 함께’라는 문장을 완성하길.

취재=박솔리 기자 solri@beautyhankook.com
사진=석근 기자 hayato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