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내가 “널리 인간을 사랑하라”는 홍익인간 사상을 강조하고, 이를 경제적 관점에서 효율적 생산과 분배, 평등과 행복권 추구의 이론으로 홍익인본주의를 제기하자 몇몇 사람은 무슨 신흥 사이비종교가 아닌가 하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개콘(개그콘서트)의 개그맨 김준현이 된다. “나를 요상한 사이비종교 신자로 오해들을 하고 그러는데, 오해하지마! 나 이래봬도 성경을 즐겨 읽는 친 기독교인이야!”

하지만 나를 민족주의자라고 지칭하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조선 땅과 단군의 역사를 죽이고, 일제시대부터 황국공정(皇國工程. 필자가 만들어낸 말)으로 조선민족을 죽이고자 하는 중국과 일본의 극우 세력에 맞서는 민족주의자는 맞다.

또한 단군을 우상으로 몰고, 홍익인간 사상을 사이비로 부정하는 일부 종교 세력에 대해서도 나는 민족주의자임을 오히려 강조한다.

나에게 홍익인간 사상의 의미를 전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도올 김용옥 선생이다. 나는 90년대에 불법 다단계판매로 쓰라린 아픔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대에 들어 그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동양학 강의로 유명한 ‘도올’은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렸던 그때, 2000년 2월15일자 중앙일보에서 ‘김용옥 교수의 마지막 강의’라는 칼럼을 통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홍익인간은 우리조선 아사달의 건국이념이며, 이 건국이념은 이 지구상의 어느 민족보다도 웅혼하고 진취적이며, 역동적인 보편주의(universalism)를 표방하는 우리 하느님의 영감이었다”고 했다.

그는 홍익인간의 본래 의미를 “고립된 개인 절대주의를 뛰어넘어 ‘사람과 사람의 사이(間)가 얽혀서 형성되는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것을 촉구하는 윤리적 명제”라고 제시했다.

그는 이어 우리민족은 “기나긴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홍익인간 보편주의를 실천해온 자랑스러운 시간의 족적을 남겼지만” 일제침략 이후 “나만 알고 나의 좁은 울타리만 알며, 모든 공적 공감과 이념을 포기해버렸다고” 아쉬워했다.

그 같은 현상에 대해 ‘도올’은 ‘국체(國體)의 상실’이자 ‘아(我)의 상실’이며, ‘사회의 상실’이고, ‘나 주체적 삶의 상실’이었고, ‘자기배반의 역사’였다고 한탄했다. 그 사상을 되살리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바로 ‘도올’ 선생의 그 말이 나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나는 그때부터 홍익인간의 공존번영의 이념을 강조하며, 불법 다단계판매와 방문판매 피해자들의 금전적 손실을 조금이라도 회복시켜 주어야겠다는 시민운동에 돌입했다.

‘도올’이 ‘민족 내부의 도덕적 빈곤성의 산물’로 남북분단까지 발생하고, IMF 등 여러 국가의 위기들을 불러온 것은 한민족이 홍익인간 이념을 망각하고 포기한데서 생겨난 것이라는 지적은 바로 내가 속했던 그 경제 집단이 우선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에게 세계주의에 반하는 민족주의라고 어깃장을 놓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정말 눈물이 났다. 일본 식민지시대와 해방 전후의 좌우 대결시대에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벌인 좌익계열에서 ‘민족’보다 ‘계급’이 우선해야 한다며, 홍익인간 사상에 대해 민족주의라고 비판을 한 것과 같은 논리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기독교부흥에 앞장섰던 이승만 정권에서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제시한 안호상 박사(문교부장관) 등 주도세력들은 대부분 사랑과 평화를 강조했던 기독교인들이었다. 민족정신의 회복으로 홍익인간 국민운동을 펼친 주요 인사 중의 한 사람인 함석헌 선생도 기독교인이었다.

내가 2001년부터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벌일 때, 가장 나를 화나게 하는 때가 바로 “홍익인간 사상이 자칫 지나친 민족주의로 흐를 경우 ‘글로벌 시대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내는 경우다.

정말 기기 찰 노릇이다. 지나친 민족주의라니…, 그리고 세계시민이라니…?

반만년 역사에서 우리민족이 언제 제대로 된 민족주의 한 번 외쳐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우려하는 지나친 민족주의라는 것은, 우리 민족이 타민족에 대한 우월의식에 젖다 못해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 인종차별로 나타나고, 그것이 더 악화돼 그들에 대한 테러나 집단폭력(히틀러의 경우는 집단학살이겠지만)의 형태로 발전하는 경우에나 붙일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오히려 그 반대로 살아왔다. 타민족이 추구한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희생양이 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올리는 민족주의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다.

그러다 일본이 결국 조선을 강제 합병, 전국에 그들의 천황과 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워 황국신민의 예를 갖춰 참배케 하고, 우리민족을 식민지 B급 열등인간으로 취급하면서부터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복본(複本)하고자 등장한 것이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었다.

그 홍익인간 사상이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로 발의되고,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로 이어지며, 상해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으로, 1945년 8.15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교육이념으로 채택되고 일민주의(一民主義)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안호상의 일민주의가 이승만 정권의 찬양에 악용된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일제하 조국독립의 명분과 해방정국의 건국이념을 위해, 또한 국민철학의 하나로 추진된 홍익인간 정신을 오히려 민족주의로 매도하고 폐기처분하자고 말한다면, 우리의 민족 사상으로 그 무엇을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분명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민족이다. 아니 민족주의 비슷한 것이라도 한 번 쯤이라도 해봤다면, 홍익인간 사상 때문에 민족주의가 우려된다는 말을 백 번이라도 들어도 좋을 것이다.

삼국통일 시대에 수만 명의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이 당나라에 노예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10만~40만의 노예(포로) 중에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넘겨져 서양으로 팔려간 사람들도 있었다. 병자호란 때는 최고 60만 명이 노예로 끌려간 아픈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이 불과 100년 전 일본에 의해 또 다시 무참히 짓밟히는 상황이 일어났다.

1907년 도쿄 만국박람회가 일본에서 열렸다. 그때 조선은 이미 일본의 수중에 넘어간 뒤였다. 그 박람회에서 지금으로는 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민족 자존심이 송두리째 박살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일본이 마치 동물원 원숭이를 우리에 가둔 것과 같은 인종 전시장을 박람회장의 별도 코너로 마련했다. 이른바 ‘학술인류관’.

불행하게도 그곳 ‘전시인종 품목’에는 조선인종 남녀 한 쌍이 포함되어 있었다. 홋카이도 아이누족, 타이완 생번족, 류큐(오키나와)족, 아프리카 토인 등 당시로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희귀종’ 32명과 함께한 전시였다.

불과 100년 전까지 우리는 이렇게 동물원 원숭이처럼 전시되고 구경거리가 되었던 민족이다. 그래서 눈물과 분통이 터져 우리 민족의 정통성의 자산으로 삼고자 간신히 찾아낸 것이 때 묻고 빛바랜 ‘하늘님의 가르침’ 홍익인간 이었다.

임시정부가 독립을 위해 싸울 때 건국강령에서 채택했듯이,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 후 홍익인간을 교육의 기본이념으로 채택했다. 그를 통해 대한민국은 일제가 강요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교육에서 벗어나 ‘보편적 이상’과 함께 ‘민족의 국적성’을 함께 확보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나에게 민족주의자라고 침을 뱉는 한국인이 있다면 그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이제 홍익인본주의로 세계 최고의 상생번영 경제 시스템을 만들고, 보란 듯이 세계시장에 전시할 것이다. 나는 이 일이야말로 민족 자존심의 표현이자 세계인에게 혜택을 주는 세계주의의 길이라고 과학의 이름으로 확신한다.

노규수_ 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 해피런㈜ 대표이사. 2013년 포춘코리아 선정 ‘2013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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