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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통령을 지낸 요한네스 라우를 기억하며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독일 대통령을 지낸 요한네스 라우(Johannes Rau)의 번역된 저서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는 말은 무신론자나 하는 말입니다』를 읽으면서 독일의 저력은 기독교인 정치인들에게서 비롯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라우 대통령은 1931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초등학교와 직업학교를 졸업한 후 출판사에서 일하던 중 1951년 독일국민당(Gesamtdeutsche Volkspartei)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1957년 독일사회민주당(SPD)으로 당적을 바꾼 초보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1958년부터 1999년까지 인구가 가장 많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Land Nordrhein-Westfalen, 인구: 약 1,800만 명) 주의회 의원으로 활약했으며, 후반부 20년은 주지사로 일했고, 이어서 독일 대통령이 된 전형적인 정치인이었다.

라우 대통령의 저서는 그의 강연원고와 설교원고 그리고 성경묵상 원고 등을 모은 것으로 2006년 그의 사후에 마티아스 슈라이버가 엮어서 출판한 것이다. 번역된 저서의 제목은 20개의 글들 가운데 한 장(chapter)의 소제목을 번역자가 임의로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본래의 책 제목은 『희망하는 사람은 행동할 수 있다』(Wer hofft, kann handeln)이다. 종말론적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매일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리고 세상 한 가운데서 책임있게 행동하며 살아야 한다는 그의 신앙고백의 핵심을 책을 엮은이가 뽑아서 제목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싶다.

라우 대통령은 그의 글들을 통해서 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진솔하게 밝히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의지할 수 있는 닻이자 든든한 발판이었고 아르키메데스의 축이었다. 특히 예수께서 가르치신 산상설교(마태복음 5장~7장)의 말씀은 개인을 향한 위로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을 향한 큰 도전이자 삶의 척도라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산상설교의 척도로 산다는 것은 곧 세상의 기준과 맞서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겉은 기독교인이라 말하면서 정의, 평화, 자유, 관용의 가치에 대해서는 낯설어하고, 오히려 성공, 번영, 이기심과 탐욕을 익숙하게 따르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렸다고 볼 수 있다.

라우 대통령은 기독교인이란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과 온 세상을 위한 존재라고 보았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했다. 기독교인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서는 안 되지만, 세상의 방식을 쫓아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기독교인의 신분은 세상을 떠맡아 바꾸고 개선하며 인간이 살 만한 곳으로 함께 만들어갈 책임을 짊어진 지위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신앙을 개인의 사적인 것으로 축소하거나, 교회를 사유화하거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다.

라우 대통령은 하나님의 나라를 죽은 후에 직면하는 ‘저 세상’의 차원에 두기보다는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차원을 더 중시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리새인의 경건이 넘치는 세상보다는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을, 종교성이 넘치는 세상보다는 기쁨이 더 늘어나는 세상을, 온통 그리스도를 믿는 세상보다는 더욱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다고 강조했다.

라우 대통령은 한 하나님, 한 아버지, 한 주님만 계시다는 바울의 신앙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다. 세상에는 여러 신과 여러 아버지, 여러 주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것이 용인되는 순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소유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분이 사라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단호하게 질문했다. 우리 각자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신이 존재하고 있는가. 우리를 다스리는 주인이 되려고 경쟁하는 신들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과연 그분 한 분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통하여 살고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누구도,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도, 어떤 정치체제나 어떤 경제체제도, 한 분 하나님 앞에서 그분과 등식화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특히 산상설교의 말씀을 세상 한 가운데서, 특히 정치현장에서 실행하고자 노력한 요한네스 라우 대통령을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신앙을 정치적인 기회를 얻는 기회로 도구화하기보다는 정치현장에서 신앙적 가치가 꽃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인 정치인들은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의 나라’에 근접하도록 정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빙자한 정치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국민을 자유롭게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22년 한국의 대선 후보자들 가운데는 종교가 기독교인 후보자들이 여러 명 있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기독교인 후보자들이 그들의 동기를 신앙적 가치로 조정해야 하지 않을까.

정종훈/ 연세대 교수, 평화통일연대 공동대표

정종훈  chjeong59@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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