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뉴스 북한
어머니가 탈북을 권유하다한국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1) - 탈북과정

 
최근 탈북자 2만 명 시대가 오면서 탈북대학생의 수도 1천명에 도달했다고 한다. 많은 탈북대학생들이 학업에 대한 열정과 통일된 한반도를 꿈꾸며 공부를 하지만 열악한 북한의 교육환경현실과 탈북과정에서 중국을 비롯한 제3국을 경유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적정연령대에 공부를 못하고 도피자의 삶과 같은 생활을 해오다가 보니 한국에 와서 갑자기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적응을 한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남북한의 문화적인 이질감, 경제적인 어려움과 무연고 청소년들의 경우 후원자역할을 해줄 안락한 가정이 없다보니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가미되어 대학생활에 적응하는데 더 많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처음 대한민국에 도착하여 하나원이라는 정착교육기관에서 2개월 동안 교육을 받을 당시 필자를 비롯한 많은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남한에 온 것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왔다고 감격의 말을 많이 합니다. 한국에 살면서 최근에 필자가 느끼는 것은 한국은 북한에 비하면 기본적인 생존권(의식주)보장과 인권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천국과 같은 곳이라는 찬사가 나올 만도 하다는 생각과 함께 남한이라는 자본주의 사회가 북한의 사회주의 사회보다 생존경쟁이 치열해 남한사회에 적응하는데 더 많은 고난과 문제들에 봉착하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상상도 못하는 험난한 과정을 제가 북한에서 남한에 오기까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남한 정착도 훌륭히 이겨낼 것이라고 저를 치켜세우곤 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인간은 누구나 저와 같은 상황에서는 저와 같이 행동했을 것이며 남한 사회에 정착을 하는 것은 북한을 탈출해 제3국을 거쳐 한국에 오기까지 과정과는 또 다른 험난한 과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단절된 한반도는 6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엄청난 사회․문화적 이질감으로 변해 왔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남북한 사회․문화적 차이로 제가 겪었던 어려움과 문제점을 학교생활 중점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탈북 과정

탈북과정을 소개하는 이유는 탈북동기와 북한을 탈출하여 제3국을 경유하여 남한으로 오게 된 과정을 통해 본다면 탈북대학생들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이 어떤 근본적인 이유에서 오는지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에 저의 간략한 탈북과정을 소개합니다.


가. 어머니가 나에게 탈북을 권유하다

북한을 최종적으로 탈출하게 된 것은 1997년 10월 말경이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당시(1997년) 나는 북한고등중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저는 군입대 예비신체검사를 마치고 6개월 후면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군대입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저에게 자주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군에 입대하여 10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느니 차라리 중국으로 가라고 권유를 하시고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말씀을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저도 남자답게 군에 나가서 조국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위해 내 청춘을 기꺼이 내놓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군장교(대령)출신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는 어릴 적 때부터 김부자를 우상화하는 세뇌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따라서 저에게는 조국이 당연히 중요했고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이며 군부대에서 승진을 하여 당당히 북한에서 성공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로울 당시에도 어머니는 중국에 경제적인 북ㆍ중 교류를 위해 4­5차례 정도 다녀왔었기에 중국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군에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통지서가 온 네 학교선배들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급동료(남녀공학)들의 형님이나 오빠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자주 접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저를 설득하기 위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북ㆍ중 국경지역을 한 달 가까이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당시 저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기는 했지만 생계를 위해 학교에 나가는 일수가 일 년 중 삼분의 일도 되지를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위한 장사의 길에 나섰던 것입니다.


   
▲ ⓒ허이삭

나. 두만강을 경계로 너무나 대조적인 북한과 중국의 경제적 격차

어머니는 저에게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사는 모습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북한은 전력이 없어서 어두컴컴한 밤에 촛불을 켜두고 저녁을 먹어야 했지만 중국은 집집마다 밝은 불빛이 켜져 있었습니다. 중국 쪽 도문(圖們)이라는 도시는 밤이면 다양한 색상의 네온사인이 깜박였지만, 도문(圖們) 접경인 북한의 남양지역은 너무도 대조적이었습니다.

포장도로에서 승용차를 비롯한 화물차들이 거침없이 달리는 도문(圖們)의 모습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북한 쪽은 가솔린이 없어 자동차를 일제시대 때의 목탄차로 개조를 하고 도로도 김일성의 혁명전적지나 혁명역사박물관이 연결된 도로에만 포장도로를 했습니다. 대부분은 비포장도로였으며 비가 많이 온 날에는 도로의 토사가 빗물에 휩쓸려 내려가서 여기저기 패인 곳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두만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린다고 하시면서 북한은 더 이상 미래가 없으니 차라리 중국에 가서 유학하는 셈치고 공부를 하라고 권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생각에 비하면 제 생각은 우물 안에 개구리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을 듣고 보니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어찌하여 두 나라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차이가 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저런 새로운 세계(중국)에 한번 가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때로부터 어머니는 저를 탈북 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두 남동생 몰래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군 장교 시절 때부터 주체사상과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대대정치위원으로 김일성 김정일을 옹호하기 위해 철저히 무장을 해야 한다고 군중들 앞에서 선전을 하는 선동가였으며 소위 북한에서 말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제가 탈북을 시도한다는 것을 아신다면 용서치 않았을 것입니다.


다. 어머니는 탈북하기로 결심한 맏아들의 행운을 빌다

어머니는 북한사회가 발전이 없다고 생각을 해서인지 미신을 믿는 편이었습니다. 북한을 탈출하기 20일 전쯤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나이가 90살 가까이 된 할머니가 사는 집에 데려가셨습니다. 이 할머니가 점괘를 잘 본다고 소문이 났으니, 한번 너의 미래가 어떤지를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그 동안 모아온 100원이 안 되는 돈을 할머니 앞에 꺼내놓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 정도의 돈이었으면 흰쌀을 2kg정도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 저의 집안 형편으로는 큰돈인 셈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이 하얀 백발의 할머니를 보니 귀신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할머니가 제 관상을 한번 훑어보더니 당신은 부모와 30년은 떨어져 있을 팔자라며, 부모와 떨어져 있어야만 성공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어머니는 더욱 더 저를 중국으로 탈출시키려고 다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라. 동생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다

북ㆍ중 국경수비대까지 다 포섭을 해놓은 상태에서 드디어 탈출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출장 중이었고 저는 두 남동생과 어머니와 최후의 만찬을 같이 했습니다. 또한 수비대에게 줄 뇌물로 빵과 술을 준비했습니다. 동생들과 마지막 점심 식사를 하고 저는 서랍에서 그 동안 아껴두었던 책과 여러 가지 집기류를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두 남동생은 갑작스러운 나의 호의에 의아해하면서도 좋아서 얼굴이 상기가 되었습니다. 두 남동생과 저와의 나이 차이는 2살, 3살 차이밖에 나지를 않아, 자주 싸우기도 했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하니 그 동안 동생들에게 잘 못해 준 것이 너무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내가 동생들을 껴안고 포옹을 해주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가슴속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마. 장사라는 명목으로 탈북약속지점으로 향하다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두 동생에게 너의 형과 어머니는 장사하러 떠나니 저녁은 둘이서 같이 밖에 나가 놀라고 내보셨습니다. 저는 술이 들어 있는 배낭과 빵이 들어 있는 가방을 지고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려는 찰나에 어머니는 저를 잠깐 멈춰 세우시더니 주머니에서 못과 종이에 싼 소금을 꺼내시더니 집의 네 귀퉁이에 뿌리라고 하고 소금을 뿌린 다음에 못을 망치로 박으셨습니다.

이것은 집안의 장남으로서 이제 탈출을 하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아들을 위한 어머니가 준비한 하나의 미신적 의례였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제 마음을 뜨겁게 함을 난생 처음 느꼈습니다. 드디어 어머니와 함께 저는 생계를 위해 장사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북한의 최북단인 북ㆍ중 국경지역인 풍서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풍서리에서 브로커를 만나서 두만강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바. 마지막으로 본 아버님의 처량한 모습

어머니와 함께 풍서리를 향해 거의 절반 정도 걸어갔을 무렵에 저기 먼 발치에서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배낭을 비롯한 많은 짐을 지고 가는 어머니와 저를 보자, 아버지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묻기에 장사하러 풍서리쪽으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럼 무사히 장사를 잘 마무리하고 집에서 보자고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셨다. 저는 돌아서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는데 왠지 그 뒷모습이 처량하고도 불쌍해 보였던지…… 이것이 제가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소위 북한에서 말하는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늘 썩고 병든 자본주의 사회의 유혹에서 우리식 사회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설파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을 하니 불쌍하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를 않았습니다.


사. 어머니의 마지막 사랑을 안고 탈북을 하다

드디어 어머니와 함께 풍서리에서 중국으로 탈출시켜주기로 한 브로커를 만나 북ㆍ중 국경수비대원을 만났습니다. 그때가 저녁 9시에서 10시 사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가져왔던 빵과 술을 국경수비대에게 주고 두만강까지 그 수비대원이 어머니와 저를 안내했습니다. 저를 두만강에 넘어 보내기 직전에 어머니가 왜 그리도 많이 우시던지…… 어머니는 저를 붙들고 중국에 있든 어떤 곳에 있든지 꼭 공부를 하라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16살의 젊은 패기에 어머니 보고 울지 마시라고. 아들이 더 좋은 곳으로 가니까 좀 있다가 다시 보게 될 것이라며 어머니를 위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마음에 빨리 두만강을 건너 중국이라는 땅을 밟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면 어머니는 점괘를 보면서 그 귀신같이 생긴 할머니가 당신 아들은 부모와 30년 이상은 떨어져있을 팔자라는 말에 다시 못 볼지 모를 아들 때문에 다시 한 번 제 얼굴을 기억해 두려고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눈물을 흘리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으며 처량하면서도 강인한 어머니의 사랑의 마음을 지금도 안고 살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아. 도피생활이라는 악순환의 연속_중국에서의 삶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두 남동생을 두고 저는 그렇게 북한이라는 세상을 등지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1997년 10월 말경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제가 꿈속에서 그리던 동경의 세계가 아니라 제가 겪어야 할 험난한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에서 공안당국의 눈을 피해 도피생활은 5년이나 지속했으며 그 과정에서 저는 부모님의 바람 같은 공부를 하기 위해 중국에 유학을 온 것이 아니라 냉혹하고 위험천만한 도피생활을 하면서 하류인생살이 공부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한족이 운영하는 농가에서 소와 양, 염소를 방목하면서 6개월 동안 생활을 했고, 그 다음 2년 동안은 식당에서 설거지와 가축을 도륙하는 일을 했고, 그 후 6개월 동안은 벽돌공장에서 무거운 밀차를 끌며 살았으며, 3개월 정도는 심양에서 농사일을 했습니다. 또, 6개월 정도는 고속철도공사장에서 돌담을 쌓는 일을 하다가 드디어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도피생활로,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서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던 악순환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자. 잠시나마 상처받은 영혼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를 만나다

그렇게 힘든 삶 속에서 만난 미국 선교사님은 제게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선교사님과 함께 성경 통독을 하면서 저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상처 받은 제 영혼이 치유될 수 있는 안식처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그런 황금기도 잠시, 중국 공안당국에 선교사님이 강제추방령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선교사님은 더 이상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같이 생활했던 저희 8명의 북한 동포들은 함께 그렇게 동경하던 자유대한민국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내몽골 사막 국경 지대를 넘는 과정에서 저를 비롯한 두 명만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2001년 6월에 소원하던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됩니다.
(1) 탈북과정 - 어머니가 탈북을 권유하다

(2) 학교생활 - 남한 사회의 현실이 나를 대학으로 떠밀었다
(3) 탈북자 - 탈북자라는 말 한마디에 ‘범죄자’ 취급을 받다
 

 

김철훈  @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 제인 2011-12-23 12:15:30

    "남한 사회에 정착을 하는 것은
    북한을 탈출해 제3국을 거쳐 한국에 오기까지 과정과는
    또 다른 험난한 과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모든 탈북자들의 고백일거라 생각됩니다.

    유코리아뉴스가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하여
    또 다른 험난한 과정인 남한 사회 정착을 지원하는 매체가 되길 기대합니다.   삭제

    • hephzibah 2011-12-23 12:08:46

      어머니의 사랑은 남이나 북이나 동일하다는 것이 새삼스럽습니다.
      사람살리는 어머니의 사랑 , 그사랑을 우리도 해야겠지요....   삭제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