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감성 터치로 뉴욕에서 얼굴을 디자인하다

 
 

VICKYC5의 비키 원장의 감성은 어려서부터 시작되었다. 눈앞에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여러 번 머릿속에 곱씹어 본 후 느낀 감정을 표현해야 직성이 풀렸다. 이런 그녀에게 타고난 재능은 손재주였고 붓을 친구 삼아 그림을 그렸다. 화려한 컬러 속에서 그녀는 꿈을 키웠고 디자인 대학의 시각디자인 학과로 진학했다. 디자인의 매력에 푹 빠져 있을 때쯤 그녀는 졸업을 하게 되었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바로 뉴욕 이민이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주위의 우려를 무릅쓰고 뉴욕을 선택했다. 뉴욕에 도착해서 그녀는 전공을 살려 신문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고 텍스처 디자이너로 활동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일하면서 느낀 이질감은 컸다. 모든 사람이 주어진 것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반면 그녀는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동그라미란 세상 안에서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왜 그 속에서 세모일까?’

그러던 그녀는 운명적인 만남을 맞이한다.     

“뉴욕에 도착해서 우연한 기회에 패션 필드를 가게 되었어요. 그 순간 거기서 본 현장은 저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어요. 너무도 큰 세상에 놀란 건 물론, 바쁘게 움직이는 스탭과 모델들.. 모든 것이 새로웠지요. 집에 돌아와서도 그 광경이 잊혀지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한 가지 생각만 드는 거예요. ‘아 나도 그곳의 일원이 되고 싶다’”

처음에는 만만치 않았다. 생각과는 달리 현지 패션 시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말처럼 흥미 있는 일만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모든 벽이 그녀를 가로 막고 있었다. 언어 문제, 문화차이, 한마디로 갓 이민 온 그녀에게 뉴요커의 예술성은 없었던 것이다. 단지 시키는 일만 잘하는 성실한 한국인 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가까운 지인의 결혼 준비로 살롱에 부케를 가져다주게 되었고 그때 그녀는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 거기서 틈새시장을 봤어요. 당시 1996년에는 뉴욕 교포 사회에서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란 직업으로 웨딩 필드에서 일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고자 새로운 붓을 잡았다.

■VICKYC5 NO.1 아티스트

▲ VICKYC5의 비키 원장
▲ VICKYC5의 비키 원장
일을 하다 보니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웨딩 그룹 원(wedding group one)’을 차리게 되었다. 일반적인 웨딩숍이 아닌 촬영부터 허니문까지 웨딩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컴퍼니의 ‘뷰티 원(beauty one)’ 책임자로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사업가로서 조금씩 나아갔다.‘웨딩 그룹 원’은 한인 사회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참신한 발상과 최상의 서비스는 모든 이를 만족시켰고 명성은 계속해서 높아져 갔다. 플러싱을 시작으로 뉴저지, 소호, 그리고 LA까지 시간이 갈수록 사업은 확장 되었고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기분 좋은 우스갯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다 보면 크고 작은 트러블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열정 하나로 한 마음이 되어 힘을 합쳤다. 그렇게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는 두 남녀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 했다. 일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 주는 행복한 일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 하나로 타국에서의 외로움과 슬럼프를 이겨낼 수 있었지만 ‘웨딩 그룹 원’은 10년을 끝으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서로가 다시금 인생을 돌아보고 새 출발을 해보자는 결론으로 그녀는 ‘뷰티 원’을 접고 새로운 브랜드로 다시 한 번 도약을 꿈꿨다. 이것이 바로 VICKYC5의 시작이다.
본인의 이름을 딴 VICKY와 그녀가 쓰는 C5의 브러시를 합쳐 만들었는데 C5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쓰는 브러시 중 포인트 메이크업을 할 때 사용하는데 그래서 VICKYC5의 의미는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보다는 포인트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다. 눈앞에 이익을 버리고 나니 그녀에게 남은 건 경험과 브러시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불안함 보다는 희망으로 작은 스튜디오를 열었고 함께 할 아티스트를 발굴해서 성장 시켰다. 그 결과 그녀 혼자였던 VICKYC5는 이제 30명이 넘는 아티스트들과 함께 하고 있다.

붓을 잡은 지 2013년 이면 20주년이 되는 그녀는 아직도 VICKYC5의 No.1 아티스트다. 이제는 웨딩 업계에서 입지도 다졌고 명성도 쌓였지만 사업의 확장보다는 여전히 필드에서 활동하는 게 행복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직원들이 붙여준 별명은 ‘매일 짐 싸는 아티스트’이다. 그녀를 원하는 신부를 위해서라면 어느 곳 이던 마다하지 않고 떠나는 모습에 VICKYC5의 열정은 언제나 뜨겁다.

▲ VICKYC5의 비키 원장의 웨딩 기록들,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여유로움과 낭만이 가득하다
▲ VICKYC5의 비키 원장의 웨딩 기록들,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여유로움과 낭만이 가득하다
■Awesome ‘New York wedding’
보편적인 한국 웨딩 문화에 비해 뉴욕 웨딩 문화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보여주기 위한 웨딩이 아닌 하객과 함께 즐기는 파티의 개념으로 뉴욕은 웨딩, 디너, 칵테일 파티의 순서로 하루 종일 진행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결혼식에는 아티스트가 함께 한다. 분위기에 따라 메이크업을 바꿔주는 것은 물론 하루 종일 있어도 방금 전에 한 것 같은 신선함을 유지시켜 어느 순간에도 신부는 빛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티스트는 신부에게 그 날 만큼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다. 한국의 다소 엄격한 고객과 아티스트의 사이가 아닌 친구의 입장에서 해주는 메이크업이다 보니 서로의 만족도는 배가 된다고.

“저희 아티스트 같은 경우에는 결혼식 백그라운드에 앉아서 신부의 메이크업을 수정하기만을 기다리지 않아요. 그 파티의 일원으로서 함께 축복해주고 즐기는 거죠. 술도 한 잔 하고 함께 춤도 추죠. 한국에서는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이런 것이 한국과 뉴욕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그녀의 말처럼 뉴욕의 아티스트들에게는 정중함보다는 친근함을 먼저 느낄 수 있다. 너무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다 보면 고객이 더 불편해 하기 때문에 그녀는 아티스트에게 ‘Friendly’를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에 가장 먼저 밑받침 되어야 하는 것은 ‘실력’이다. 만약 실력이 뒷받침 되어 있지 않는 다면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인상 한 번 찡그리는 한국 신부와는 달리 가장 행복한 날을 망쳤다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뉴욕 신부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고 싫음을 확실히 표현하는 것이 뉴요커들의 특징이에요. 기분 좋게 이야기 하다가도 하나가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끝내버리는 것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에요. 그래서 저희 아티스트들이 신부가 원하는 요구 사항을 말하기 전에 빨리 캐치해서 해줄 수 있도록 트레이닝 시키고 있어요.”

그녀의 말처럼 뉴욕에서 아티스트로 활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비단 실력뿐 만이 아니다. 뉴욕의 감성을 이해해야 하고 뉴욕의 문화에 대해 충분히 공부해야 한다고. 교과서로 배울 수 없는 그녀가 겪었던 20년의 노하우를 아티스트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인터뷰 중간 계속 나왔던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그녀의 직원들이 왜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 지 알 수 있었다.

■VICKYC5 울타리

 
 
VICKYC5에서는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6년 째 운영하고 있다. 수시로 모집하는 상업적인 아카데미가 아닌 정말 뉴욕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프로 웨딩 메이크업 아티스트 클래스’를 일 년에 한 번만 운영한다. 뉴욕엔 메이크업을 배울 곳이 너무나 많지만 풍부한 실전 경험과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은 프로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배울 곳은 마땅치 않는 것이 현실이다. 괜찮은 커리큘럼을 가진 아카데미를 발견한다고 해도 교육 과정이 끝나면 학생은 더 이상 도움을 구할 곳이 없다. 하지만 한인 최초 웨딩 메이크업 VICKYC5는 다르다. 투자한 만큼 그 이상을 얻게 해주는 다는 목표로 VICKYC5는 인재를 중요시 한다.

“K-pop 덕분에 한국 메이크업의 위상은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어요. 저 또한 어느 인종을 봐도 한국인의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매번 깨닫고요. 하지만 단순히 능력만 가지고 뉴욕에서 아티스트로 성공하기에는 힘든 점이 너무나 많아요. 한국에서 메이크업을 하던 친구들이 부푼 꿈을 안고 뉴욕으로 오지만 충분한 사전 지식 없이 확실한 준비가 없어서 정말 본인이 원하는 필드가 있지만 그 근처도 가지 못하고 좌절해서 돌아가는 모습을 많이 봐왔거든요. 제가 처음 뉴욕에 왔을 때도 그랬어요. 저에게 조언해 줄 선배가 없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갈까’라는 생각을 하루에 수십 번도 더 했으니까요.”

같은 한국인으로서 능력은 뛰어나지만 도움의 손길이 없어 결국 실패하는 많은 후배들을 보면서 그녀는 중간자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영하게 된 것이 VICKYC5의 인재 프로그램이다. 약 3개월의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VICKYC5의 인턴 십을 부여하고 프로메이크업아티스트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여유가 된다고 해서 이 교육을 모두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을 받기 전에 인터뷰를 통해서 눈빛, 마인드, 자세를 파악하고 나서 함께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한다. 수도 없이 밀려오는 요청을 거부하고 일 년에 딱 한 번만 아카데미를 오픈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경우에는 뉴욕의 다양한 에이전트로 진출하거나 VICKYC5의 프로 아티스트로 활동한다.

“교육을 받다 보면 자기 목표가 분명해져요. 우리와 함께 하는 길도 있지만 각자가 원하는 바는 다르니까요. 저는 학생들과의 많은 상담을 통해 하고자 하는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어요. 저는 강요하지 않아요. 본인이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이 본인에게 맞는 일이니까요. 직원들이 헤어는 하고 싶지 않고 메이크업만 하고 싶어 한다면 저는 헤어 하지 말라고 말해요. 그날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 일을 쉬게 해주고요. 이 아름다운 직업이 직원들에게 ‘해야만 하는 일’이 되는 것은 원치 않거든요.”

그녀의 확고한 마인드 덕분에 VICKYC5의 교육 과정은 입 소문을 타고 한국에서도 문의가 늘고 있다. 상업적인 광고는 일체 차단한 체 웹사이트로만 운영하지만 뉴욕에 대해 궁금해 하는 모든 것을 친절히 설명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신뢰는 대단하다.

이제는 후배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할 의무감이 생긴 것 같다는 그녀는 뉴욕에 있는 아티스트를 꿈꾸는 학생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아티스트를 위해서 몇 년 만에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막연한 꿈을 꾸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그녀는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고 고민에 귀를 기울여 주고 싶다고 한다.

▲ 뉴욕 VICKYC5의 전경, 아늑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에 시선이 머문다
▲ 뉴욕 VICKYC5의 전경, 아늑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에 시선이 머문다
뉴욕에서 메이크업을 시작한 지 내년이면 20주년이 되는 VICKYC5는 그 동안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뉴욕 웨딩 뷰티’를 주제로 갤러리를 준비 중이다. 이제 뉴욕의 ‘동양 뷰티’ 에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이 최고의 자리를 내려놓으려고 한다. “여기서 만족하면 후배들이 더 높은 꿈을 꿀 때 함께 할 수 없잖아요. 저는 후배들이 제가 겪었던 시련보다는 눈앞에 펼쳐지는 희망만 보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제는 더 큰 꿈을 꾸려고 해요. 후배들이 있기에 저도 계속해서 도전을 할 수 있고 후배들도 제가 있음으로 힘이 된다면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뉴욕에서 본인의 이름을 걸고 성공하기까지는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그녀는 차근차근 탑을 쌓아 올리고 있다. 탑의 마지막 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언젠간 완성될 탑을 기다리며 지금 그녀의 탑 중간은 ‘2013년 주류사회 진출’이다.

글․사진=이지은 뉴욕 통신원 ellyjieun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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