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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국경을 넘어야 했을까중국 평화발걸음 동행기(7)

8월 8일(수) 다섯째 날

숙소였던 송강하를 출발, 도문, 용정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아침 경건회를 가졌다. 나눔 중에 탈북자, 조선족, 북한 사람을 통일의 주역으로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걸 남한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지 모르겠다. 통일이든 뭐든지 주도해야 하고, 이름을 내야 하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나바의 영성을 떠올렸다. 남은 세우고 자신은 이름 없이 빛 없이 사역하는 모습. 자기를 비우는 십자가의 영성이 통일한국의 여정에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의 영성, 눈물의 영성, 외로움의 영성, 한겨울의 영성도 매 한가지일 것이다. 지금 남한 교회엔 없는 영성, 하지만 북한 지하 교회에는 살아 있는 영성 말이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내어던지는 영성, 그 일을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전문적인 훈련을 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전사를 각오하는 자세, 그리고 목표가 완성된(통일이 된) 뒤에는 모두들 나와서 전리품을 취하듯 한 자리씩 차지하려 할 때 아무 말 없이 뒤로 빠질 수 있는 태도. 민족의 위기 때마다 초개처럼 일어나 생명을 던졌던 의병들 같은 마음이다.

백두산의 너른 품을 장식한 꽃들은 가까이서 가보니 작고 보잘것없는 들꽃들이었었다. 이것들이 백두산을 알프스 같게, 백두산 같게 했었다. 압록강 강변을 굽이굽이 북한의 마을들, 그 마을 앞 강가에서 물놀이 하는 풍경이 눈에 부시도록 아름다웠던 이유는 크고 화려해서가 아니었다. 보잘것없지만 그 안에 순전함, 순수함이 있어서였다.

1시간 반 쯤 지났을까. ‘강원도 식당’ ‘약국’ 등 한국어 간판이 즐비한, 약간 번화한 곳이 나온다. 이도백하(二道白河). 백두산 여행의 거점이라고도 하고 일제 시대 항일운동의 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도 한다. 이쪽은 어딜 가나 ‘항일운동의 본산’ ‘항일운동의 거점’ 아닌 곳이 드물다. 그만큼 일제 시대 때는 민족 선배들의 생활터전이었던 것이다. 용정까지 가는 찻길엔 온통 전나무가 우거져 있다. 순서대로 이번엔 평화한국 최대덕 이사와 김유연(이화여대 북한학 석사과정) 학생이 각각 조선족에 대해 발표했다. 조선족은 누구인가. 1860년대, 함경도에 기근이 심할 때 당시 만주 일대는 청나라 왕조의 출생지라고 신성히 여겨서 봉금(封禁)령이 내려져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다보니 황무지처럼 버려진 곳이었다. 그렇다면 간도(間島)는 무슨 뜻일까. 말 그대로 ‘사이의 섬’, 즉 두만강을 건너다보면 퇴적층이 강 옆에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 밭물을 대기 위해 도랑을 팠고 그래서 섬이 되어 간도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 그 평원을 개간한 이들이 바로 함경도에서 건너간 우리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연길로 바뀌었지만 용정은 한인들의 중심지였다. 일제 때 순사가 용정에 부임하는 걸 제일 싫어했을 정도로 독립운동의 기운이 뜨거웠던 곳이었다.

이어진 발표에서 김유연 학생은 조선족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탈북자가 가장 먼저 만나는 외국인이 바로 조선족이다. 탈북자들은 이들을 통해 자신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조선족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족을 생각하면 울고 싶어진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이 고향으로 북한의 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들어갈 사람들이다. 복음 안에서 남한 사람, 북한 사람, 그리고 조선족 이 세 민족이 연합해야 하고 연합할 수 있다고 본다.”

   
▲ 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 용정 시내를 관통해 흐르고 있는 해란강과 서전벌도 한눈에 들어온다. ⓒ유코리아뉴스 김성원

용정에 이르기 전, 저 쪽 야산(비암산) 위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용정의 상징이자 ‘선구자’ 노래에 등장하는 일송정이다. 비포장 길을 걸어서 일송정으로 향했다. 일송정에 다다르기 전 ‘용정의 노래’(‘선구자’ 노래의 원 제목) 비 옆에서 ‘선구자’를 잠깐 연습했다. 일행들의 얼굴에 비장감이 서려 있다. 구슬땀을 흘리며 드디어 일송정 정상에 올랐다. ‘솨~~’ 시원한 솔바람 소리가 얼굴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씻어준다. 일제 당시 있었던 소나무는 일제의 사격 연습으로 불에 타 죽고 지금의 소나무는 한 독지가가 새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앞에 펼쳐진 도시가 용정이고, 용정을 감싼 채 더 넓게 퍼진 들판이 서전벌. 그리고 용정과 서전벌을 가로지르는 강이 바로 해란강이다. ‘선구자’를 부르며 일송정에 올라 민족 잃은 울분과 개간의 고단함을 한 자락 솔바람으로 달랬을 선배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조금이나마 전해져 옴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일송정 안에는 10여명의 일행이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한쪽 귀는 소나무가 들려주는 바람소리에, 한쪽 귀는 이들의 기도 소리에 기울였다. “이제 민족을 살리는 본질적인 교회가 되게 하소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민족을 살리는 불씨들이 되게 하소서” 여기까지 와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며 애타게 기도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기도회가 끝난 뒤에야 이들이 대전중앙침례교회 교인들인 걸 알 수 있었다.

서전벌을 보며 저절로 의문이 들었다. 저 땅을 개간했던 민족 선배들, 그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저 너른 벌판을 개간하려 했던 것일까.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본토를 떠나고 국경을 넘었던 것일까. 그러면서 내 앞에 펼쳐진 역경들을 도전하고 넘어야겠다는 각오가 저절로 들었다.

   
▲ 명동촌 내 명동소학교 모습. '청소당번 문익환' '지각생 윤동주'라는 칠판글이 정겨움을 더해준다. ⓒ유코리아뉴스

   
▲ 명동촌 내 명동교회 전경. 사진 맨 앞 잘려진 나무는 교회 종탑이 있던 자리다. ⓒ유코리아뉴스

   
▲ 명동촌 입구에 세워놓은 명동촌 표지판. 뒷편에 보이듯 너른 들판과 병풍처럼 두른 산은 명동 일대를 감싸고 있는 풍경이다. ⓒ유코리아뉴스

용정 ‘순천회관’에서 한식으로 식사를 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명동촌으로 향했다. 명동촌은 작고 아담했다. 교회, 집, 그리고 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한 귀퉁이에는 큼지막한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가 함께 다녔다는 명동소학교는 어른 몇 명만 들어가도 꽉 찰 것처럼 조그만 교실 한 칸이 전부였다. 평화한국 허문영 대표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평화한국의 평화아카데미를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던 차에 명동소학교에 와서 보며 계속해야겠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일행은 이어서 명동교회 예배당에 들어갔다. 명동촌 기념관을 겸한 이 자리에는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며 철저히 삶의 모범을 보였던 명동촌의 아버지이자 ‘간도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약연 목사의 활동과 일제 시대 당시 명동촌의 모습이 사진 속에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이병철(춘천 주향교회) 목사가 즉석에서 강단에 올랐다. 그리고 윤동주의 서시를 빗댄 설교를 했다. “명동교회가 남북한, 동북아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살리리라”는 내용이었다.

   
▲ 중국 쪽에서 바라본 도문철교. 다리 건너편은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로동자구이다. ⓒ유코리아뉴스

   
▲ 도문교에서 바라본 두만강과 남양로동자구 모습. ⓒ유코리아뉴스

다시 버스는 중국, 북한 접경을 달려 투먼(도문)에 도착했다. 두만강 나루터로 향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두만강 물에 손을 담궜다. 가사처럼 두만강은 푸른 물이 아닌 흙탕물이었다. 북한 쪽 공장에서 쏟아내는 폐수로 중금속이 가득 든 물이라고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일행은 나직한 목소리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합창했다.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배고픔을 해결하려 강을 건너야 하는 북한 사람, 탈북자들의 신세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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