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에서 현존재로 거듭난 당신이 유빕이다.

 

▲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인간 의식에 드러나는 그대로의 "현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철학자로 현상학(Phänomenologie)의 창시자로 불린다. 독일에서 태어나 할레 대학, 괴팅겐 대학,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은퇴 후 더 왕성한 의욕과 새로운 각오로 연구와 강연에 매진하면서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죽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후대로부터 "진지한 초심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수행한 철학자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인간 의식에 드러나는 그대로의 "현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철학자로 현상학(Phänomenologie)의 창시자로 불린다. 독일에서 태어나 할레 대학, 괴팅겐 대학,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은퇴 후 더 왕성한 의욕과 새로운 각오로 연구와 강연에 매진하면서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죽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후대로부터 "진지한 초심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수행한 철학자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인류사에서 누구도 이렇게 말한 적은 없다 : '존재는 시간으로 해석해야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이것이 <존재와 시간>이다. 기존질서에 저항한, 위대한 탈주자(노마드)였기에 "하이데거는 하이데거로 읽히지 않는다." 이 말을 현대적인 용어로 줄여서 바꾼 것이 '하하노(No)'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의(定義)는 유(類)개념이 종(種)개념보다 포괄적일 것을 요구하는데 세계 내부에는 존재보다 더 큰 개념이 없으므로 존재는 정의내릴 수 없다. 고로 망각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철학적 태도를 거부하고, '先존재 後인식'을 역설한다. 이는 플라톤(이데아)부터 시작하여 후설(현상)까지 인식론이 대세인 관념철학ㆍ주체철학ㆍ의식철학을 뒤집은, 하이데거의 위대한 업적이다 : '존재가 먼저다.' 

특히 후설은 하이데거의 멘토로 볼 수 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필자의 친구인 서울대 이남인 교수(철학과)를 중심으로,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의 관계에 대한 비교연구가 활발하게 보이지만, 여기에서는 현상학의 핵심 개념을 소개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 후설의 현상학 

 

후설이 말하는 '현상'(現象)은 사실적이며 경험적인 의식이 아니라, 그 본질인 선험적이며 순수한 의식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물이나 사람들이 의미있는 형성물과 다양하게 교섭하고 있으나 그때의 자연적인 관점을 배제하여 괄호 안에 묶어둠으로써, "시간마저 판단 중지시키고" 순수의식 내지 선험적 의식을 획득한다. 이것이 현상학적인 환원이다. 

현상학적 환원의 결과로 획득된 선험적인 의식을 직관에 의해 나타내고 기술하는 것이 선험적 현상학의 핵심이다. 고로 참된 주관성에 근거를 둠으로써 초월론적 현상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처럼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 혹은 지향성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지향적 의식이 의식의 내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향적인 대상으로서의 초월적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점, 즉 우리의 지향적 시선의 촉수는 언제나 초월적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기에 존재론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인식론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 피투성이 

 

역사 없이 미래가 없듯이, 전제 없이 철학은 없다. 

세계와 시간성에 주목한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은 이미 세계 속으로 내던져진(被投) 존재, 즉 "피투성이"인데, 누구도 자신의 '있어왔음' 곧 역사성을 바꿀 수 없다. 

여기서 시간성이란 후설이 판단 중지함으로써 놓쳤던 시간을 붙잡아 풀면서 역사성/被投-순간-가능성/企投를 하나의 지평으로 탄생시킨, 획기적인 구성작용을 말한다. 

고로 인간이란 세계의 귀속성(역사성)에 의지하여 세계 내부에 있는 사물과 타자들을 상호 지시하는 맥락('처해있음'의 상황)안에서 만나고 인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뜻한다. 

예컨대 우리의 눈앞에 존재자인 물이 있다고 할 때, 그 물은 마실 물이나 손씻을 물 등 사용의 맥락 안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 즉 존재가 모든 인식의 전제인 것이다. 

또한 현존재는 이중 가장 우위에 놓이는 존재다. '사용사태전체성'에 의해 한 존재는 다른 존재를 위해 존재하지만 결국 모든 존재의 종착점은 현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벽은 못을 위해, 못은 액자를 위해, 액자는 그림을 위해, 그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특히 현존재는 유일하게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자로서 끊임없이 無(죽음)와 직면하지만 비본질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지속적으로 본질성을 되찾는 존재의 성실성을 그 근본으로 삼는다. 

고로 '나의 있음'은 나의 인식주관의 생성물이 아니므로 나의 역사성(현사실성ㆍ수동성)을 바탕으로 하여 응시적 계기(죽음)에 의한 능동적 가능성으로 전환함으로써 끊임없는 해석과 대화로 眞理를 파악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은 작은 부분일 뿐이며 현존재(Dasein)로서의 존재 의미는, '거기에(Da) 있음(sein)'으로, 매순간 인식적으로 해석하는, "이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존재와 시간>을 하이데거 방식으로 해석하면, 인간은 현존재와 세인 사이를 오가는 가역적 운동의 존재다. 

피투성이에서 현존재로 거듭난 당신이 유빕이다.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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