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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선거를 반대하다 순교당한 기주복 목사유관지 박사의 '무너진 제단을 찾아서'(10) 곡산읍교회

곡산읍(谷山邑)교회

곡산은 아비호령산맥(阿飛虎嶺山脈: ‘산맥’을 북한에서는 ‘산줄기’라고 한다.)의 서쪽 경사면이고, 북쪽에 는 언진산맥(彦眞山脈)이 뻗어 있다. 그러나 산림은 군 전체 면적의 63%이어서 특별히 산악지대라고는 하기는 어렵다. 곡산군의 처음 이름은 곡주(谷州)였다.

 교인들의 열심

곡산읍교회는 1894년에 세워졌다. 곡산 사람인 김재정(金載禎)이 서울에 왔다가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전도문서를 받게 되었는데 김재정은 그 전도문서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보여 주었다. 친구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좀 더 확실하게 알아야하겠다’ 하고서 함께 서울에 와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열심히 전도했다.

 그들 가운데는 의사가 한 분 있었는데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전도인 서경조(徐景祚)를 보내어 이들은 지도하게 했다. 서경조는 성경번역으로 잘 알려진 서상륜(徐相崙) 선생의 동생인데, 나중에 우리나라 장로교 최초의 일곱 목사 가운데 한 분이 되었다.

 곡산읍교회는 점점 부흥해서 1904년에 여덟 칸 예배당을 건축했다. 이 때 교인은 열일곱 명이었다. 1910년대에는 교역자 문제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것을 잘 극복하고 성장했다. 교회 안에 전도회도 조직하고, 전도인 양성회를 만들어서 전도인들을 훈련시켜 각지로 파송했고, 남학교와 여학교도 설립했다.

역대 담임자들

초기에는 조사들이 교회를 지도하다가 1913년에 안봉주(安鳳周) 목사가 부임했는데 이 분을 곡산읍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봉주 목사는 한국교회 초기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길선주(吉善宙) 목사와 아주 친한 사이였다. 안봉주는 길선주 목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장로가 되었고, 1911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제4회) 목사가 되어 처음에는 함경도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1913년에 곡산읍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안봉주 목사는 곡산읍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산정현교회를 거쳐 안주로 옮겨 안주읍교회를 담임하면서 안주노회를 조직했다. 안봉주 목사의 고향이 안주이다. 그 다음에는 임종순(林鍾純) 목사가 부임했다.임종순 목사는 고향이 곡산인데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곡산에서 활동하였다.

임종순 목사는 일본에 있는 유학생들을 위한 전도목사로도 활동하였고, 정주의 오산(五山)교회도 여러 해 섬겼다. 임종순 목사는 1929년부터 평양 서문밖(西門外)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했는데 임종순 목사가 담 임하고 있을 때 서문밖교회는 크게 부흥해서 매주 3천 여 명 안팎의 교인이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 때 임종순 목사는 전국을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임종순 목사는 나중에는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해방 뒤에 하늘나라로 갔다. 그 다음에 부임한 분이 채정민(蔡廷敏) 목사이다. 채정민 목사는 한국교회의 역사에 굵직하고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분인데, 예수를 믿은 다음에 전도에 열심을 내서 조사가 되어서 그라함 리(이길함) 선교사와 함께 평안도와 황해도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교회들을 돌보았다. 이 때 곡산읍교회도 돌보았다.

 채정민 목사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지도한 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채 목사는 1918년에 곡산읍교회에서 1년간 시무하였고 그 이후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몇 교회를 담임하였다. 채정민 목사는 대단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이었다. 평양노회에서는 마펫 선교사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자 채정민 목사는 정면으로 반대했다. 결국 동상 대신에 마펫기념관이 세워졌다. 채정민 목사는 한국 사회와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회개를 외치던 노선지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조택수(趙澤洙) 목사가 부임했다. 조택수 목사는 1934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제29회) 목사안수를 받은 뒤 황해도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조 목사는 황해도 황주군 영풍면 진골교회에 이어 곡산읍(谷山邑)교회와 무릉(武陵)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곡산읍교회의 담임자들은 이상하게 재임기간이 짧았다.

주일 선거를 반대하다 순교당한 기주복 목사

곡산읍교회는 처음에는 평남노회에 속해 있었다. 1911년 12월에 황해노회가 조직될 때도 곡산군과 황주군‧ 수안군에 있었던 교회들은 교회행정의 편의를 위해 평남노회에 속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평남노회에서 평양노회가 분립되었을 때는 평양노회에 속했다. 1939년에 황동노회(黃東老會)가 조직되었다. 이름 그대로 황해도 동부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관할하는 노회였는데 이 때 곡산읍교회는 황동노회에 속하게 되었다.

 황동노회는 봉산 ․ 황주‧ 수안‧ 곡산‧ 신계‧ 봉산‧ 서흥‧ 평산‧ 금천 등 여덟 개 군에 있던 교회를 관할했다. 황동노회가 조직될 때 곡산읍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조택수 목사는 부서기로 선출되었고 해방 뒤에는 노회장을 지냈다. 조 목사는 6·25 전쟁 때 월남하여 부산과 서울에서 목회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해방 뒤에는 기주복(奇主福) 목사가 곡산읍교회를 담임했다.

 기주복 목사는 1897년 10월의 어느 주일에 황해도 수안군에서 태어났는데 ‘주일에 복을 주셨다.’고 해서 이름을 ‘주복’이라고 지었다. 기 목사는 1932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는데(제27회) 해방 뒤에 곡산읍교회에 부임하였다. 공산정권이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선거를 하자 기 목사는 이를 반대했다. 기주복 목사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날 체포되어 평양교화소로 이송되어 갇혀 있다가 순교했다.

   
 

곡산읍교회는 곡산군 도화면 무릉리 길동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지금은 곡산군 무갈리(武葛里)가 되었다.  무릉리는 현재도 마을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데 지금은 무릉동이라고 부른다. 길동은 무갈리의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1904년에는 읍내면 능동리에 예배당을 지었다. 능동리는 그 뒤 호암리에 편입되었다가 지금은 곡산읍의 일부가 되어 있다.

 1938년 장로교주소록에는 곡산읍교회의 주소가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 장림리(長林里)로 되어 있다.  장림리는 길게 조성된 수림이 있다고 하여서 이름이 장림리가 되었는데 한 때는 인근의 송항리와 합해서 송림리가 되었다가 지금은 곡산읍에 편입되어 있다. 그러니까 곡산읍교회가 있었던 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황해북도 곡산군 곡산읍이 된다.

북한은 1954년에 황해도를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로 나누었다. 황해북도의 도청소재지는 사리원시이고, 황해남도의 도청소재지는 해주시인데 곡산은 황해북도에 속해 있다. 곡산군은 2007년 8월에 수해를 크게 입었다.

*유관지 목사. Ph. D. 연세대와 호서대 대학원에서 신학을,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극동방송 이사, 주옥감리교회, 목양감리교회 담임 역임. ‘평화통일과 북한선교’ ‘북한의 종교실태’ ‘기도가 흐르는 3천3백80리 강물’ 공저자. 현 북한교회연구원 원장.

유관지  yookj4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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