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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사회의 현실이 나를 대학으로 떠밀었다한국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2) - 학교생활


※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됩니다.
(1) 탈북과정 - 어머니가 탈북을 권유하다
(2) 학교생활 - 남한 사회의 현실이 나를 대학으로 떠밀었다
(3) 탈북자 - 탈북자라는 말 한마디에 ‘범죄자’ 취급을 받다


   
▲ 남한 사회의 현실이 나를 대학으로 떠밀었다. ⓒ이윤경
 

북한에서 학교생활


북한에서 학교생활이라는 간략한 나의 체험담을 통해서 북한의 열악한 교육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알 수가 있고 남북한의 학제의 차이와 교육내용의 차이로 인한 탈북청소년들이 남한에서 학업수행능력이 떨어지는 이유와 중도 탈락하는 등의 적응에서의 문제점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북한은 11년제 의무무상교육이라고 선전을 합니다. 유치원 높은 반 1년, 소학교 4년제, 고등중학교 6학년제를 합해 총 11년제 의무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육과정 하에서 고등학교 6학년 2학기를 다니던 중에 탈북을 했습니다.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4학년까지는 학교에 정상적으로 등교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등중학교 5학년에 들어가면서부터 저의 집안의 생계가 어려워지기 시작하자, 저는 학업을 중단한 채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장사의 길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소위 ‘고난의 행군’의 시기를 저희 집안도 비켜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당시 저와 같은 학급 반 학우들이 삼분의 일 가량은 생계곤란으로 나오지 못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사 분들도 간혹 수업 시간에 안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교사들도 일주일에 2-3일 정도만 학교에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학생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를 못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질 당시에도 대부분의 고등학교들은 봄 농촌동원(4월-5월 경)에 30일씩 나갑니다. 농촌동원기간이란 학교에 등교 하지 않고 완전히 농사일에만 전념을 하는 것입니다. 봄 농촌동원기간에는 학생신분이 농사꾼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또 가을에는 가을농촌동원에 30-40일 가량을 나가게 됩니다. 가을농촌동원은 그나마 학생들이 반기는 편입니다. 가을걷이를 하다 보면 쌀이나 옥수수 같은 것을 훔치거나 쉽게 접할 수가 있어서 먹는 것에는 걱정을 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방학기간과 봄가을 농촌동원기간을 빼면 일 년에 학교에서 실질적으로 공부하는 일수는 365일 중에 7개월 정도뿐입니다.

예전에는 첫 1학기를 9월에 시작을 하던 것을 1994년 7월에 김일성주석이 죽고 나서 그 업적을 영원히 기린다는 의미에서 김일성주석이 탄생한 4월을 첫 학기로 학제가 변경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1995년 겨울방학에도 학교에서 4학년 2학기 공부를 마치고 과거대로 한다면 9월에 5학년에 올라가야 할 것을 4개월 앞당긴 1995년 4월에 5학년 1학기를 시작했었습니다.


남한에서 학교생활

가.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하다

북한에 부모형제를 두고 대한민국에서 홀로 생활할 때, 저는 남북한의 문화적 차이로 공부를 비롯한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남한에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북한에서 못 마친 고등학교 과정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남한에서 고등학교의 졸업장을 취득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한에 와서도 어머니께서 늘 어디 가서나 책을 손에서 놓지 말고 공부하라며,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도 다 못 배운다던 말씀이 늘 제 가슴속에서 떠나지를 않았고 저 자신도 공부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조금은 늦은 감은 들지만 공부하기로 결심을 하고 우선 검정고시학원을 다녔습니다. 오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에는 야간으로 검정고시학원을 다녔고 학원이 끝나면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검정고시학원을 다니면서 보니까 20대 초반에서부터 50대의 나이의 아버지 벌이 되시는 분까지도 계셨습니다. 그들은 보통 주간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야간으로 학원을 다녔습니다. 나는 그들에 비하면 공부를 하는 것이 아직 늦지 않았구나 하면 자기 암시를 하자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학원공부를 따라가기가 괜찮았으나, 영어 과목은 어려웠습니다.


나. 검정고시학원에서 고등학교로의 전환

그러던 어느 날 검정고시학원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50대 되시는 그분과 같은 방향의 지하철을 타게 되었고, 서로 남북한에 대한 궁금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그분에게 늦은 나이에 공부하시기 힘들지 않으신 가고 물었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나서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있고 후천적으로 노력해야 이루어지는 것이 있는데, 자신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회사에 취직을 하여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는데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인정이 되자 늦게나마 공부를 하고 있다면서 회사에서도 학력이 없으니 더 이상 승진도 안 되고 친구들과의 술자리 모임 때 마주 앉으면 따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열심히 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나무도 어린 나무에 물을 주어야 잘 자란다면서 늦게 공부를 하니까 몇 배로 힘이 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는 그 분의 말을 듣고 난 이후에 공부에 대한 기초를 더 튼튼히 다지고자, 검정고시 학원을 그만 두고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다. 남북한 학제 및 문화적 차이로 인한 고통

2002년에 중동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중동고등학교 2학년에서 배우는 과목은 저에게 너무 어려웠습니다. 북한에서 배우던 내용과는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습니다. 수학 같은 경우에는 그 내용은 같지만 남한에서는 더 심화적으로 배우고 북한의 고등학교 영어 난이도는 남한의 고등학교 영어 난이도에 비하면 주니어 영어정도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7년이라는 기간 동안 공부를 하지 않고 사회의 부랑자로 방랑자의 삶을 살던 제가 하루아침에 공부하는 패턴에 적응한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제창하셨다는 것을 남한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역사학자들이나 알지 몰라도 고등학교에서 그런 내용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도 한마디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아마 제 생각으로는 북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우리나라 역사 같은 경우에도 남한에서는 왕족 중심의 역사를 배우지만 북한에서는 개혁중심의 역사와 고려중심의 역사로서 양반들과 나라의 관리들은 늘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거두어들인 재산을 탕진하는 탐관오리에 비유가 되었습니다.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한 고려의 삼국통일이야 말로 진정한 한반도 통일이라고 북한은 주장을 하면서 신라의 통일은 당나라와 같은 외세를 끌어들여서 이룬 비열한 통일이며 아직도 그 잔재에서 남한은 벗어나지를 못해서 주한미군이라는 외세가 남한에 주둔하고 있다고 분명 배웠습니다. 이런 저에게 남한의 교과목에 대한 지식은 어린 아이의 수준에 불과한 상태였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사회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배경지식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사회시스템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시스템에 잘 적응하도록 제 자신이 변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고, 20년 동안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 저를 한 순간에 바꿀 수 는 없지만 조금씩 변화시키고 전환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했습니다. 친구들과 나이 차이도 무려 5살이나 많았고 공부하는 데도 많은 고통이 수반되었습니다.

6.25 동란 이후 60년 이래 두 나라 두 체제 속에서 서로 다른 교육을 받으면서 서로의 대립관계 속에서 저는 남한을 썩고 병든 사회로 배웠습니다. 그런 정치적 이념 속에서 저를 비롯한 북한의 청소년들은 남한을 왜곡되게 알고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 민족의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고, 이런 현실이 제 가슴에 많은 상처를 주고, 또 저를 빨리 철들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시스템에 대한 제 이해 수준은 여전히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은 제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라. 선생님과의 관계

고등학교생활 중에 비교적 선생님들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습니다. 다행히도 2학년과 3학년 때 제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잘 이끌어 주시는 좋은 두 분의 담임선생님을 만나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2학년 때와 3학년 때 한 일주일가량 무단결석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담임선생님들이 야단을 치기보다는 저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셨습니다. 또 제 이야기에 먼저 경청을 하시면서 저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2학년 담임선생님은 직접 저의 집에 사모님과 함께 찾아오셔서 집안 살림을 챙겨주시기도 하고 집기류 같은 것도 사주셨습니다. 또 제가 학교에서 주는 ‘참 인간상’을 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서울특별시 교육감상을 탈 수 있게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제가 잘나서 받은 상장이 아니라 남한에서 훌륭하게 정착하기를 바라는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어, 제게 너무나 소중한 상장입니다.

이런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격려 때문에 부모도 없이 독학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마칠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때의 담임선생님들을 못 잊어서 스승의 날이면 꼭 찾아뵙고 인사를 합니다. 저를 격려해주신 작지만, 그 큰 격려와 사랑 때문에 힘과 용기를 가지고 잘 정착하려고 노력을 한다고 말씀드리곤 합니다.


마. 동료들 간의 관계

처음 학교에 편입했을 당시에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서먹서먹하였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하여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는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선후배 관계도 다른 학교에 비하여 철저하였고 후배가 선배를 보면 꾸벅꾸벅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저도 그 흐름을 피할 수는 없었고 될수록 있으면 학교의 흐름에 따르기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동료들에 비해 제가 5살 많아서 그런지 제가 맞추는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 하고는 그렇게 친하게 지낸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자서 지낸 편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수능공부를 하지 않고 재외국민전형으로 수시 2차 시험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수능을 보고 들어가는 친구들보다는 같이 재외국민전형으로 시험공부를 하는 학우들과 많이 친하게 지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에는 이런 친구들이 20-30명가량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따라서 미국, 유럽 등 다양한 나라에서 인터내셔널 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와서 그런지 아주 개방적이었으며 소탈한 성격을 지닌 동시에, 어디 한구석인가는 저와 같은 외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3학년에 다닐 당시에는 1교시만 정규 수업에 참여를 하고 2교시부터는 학원에 가거나, 학교에서 재외국민전형대상 독서실이 따로 있어서 거기서 공부를 하다가 오후가 되면 재외국민전형학원에서 입시공부를 하곤 했습니다.


바. 자기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

저는 남한에 와서 제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고단한 몸을 끌고 집으로 들어오면 저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고 텅 빈 공간에 저 홀로 서있으면 집이 아니라, 마치 동굴 속으로 들어 온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외출을 할 때면 집에 현관문 쪽의 전등을 하나는 켜놓고 나가곤 합니다. 늦은 밤, 불 켜져 있는 창문을 바라보면 누군가 나를 반겨주고 기다린다는 느낌에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명절 때가 되면 고향이 그리워집니다. 저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시는 지인 분들도 있지만, 그래도 외롭고 쓸쓸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너무 피곤하여 늦잠을 자다가 아침도 안 먹고 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가다가 고등학교 3학년 선배에게 인사를 안 했다고 따귀를 맞은 적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분한 마음을 인내하기로 결심하고 인사를 꾸벅 하고 용케도 그 상황을 모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깟 따귀를 한 대 맞은 것이 북한에서 힘든 상황에서 고생할 부모․형제와 중국에서 쫓기어 살던 생각을 떠올리면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제 자신을 위로하며 그냥 넘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분통이 터지는 마음 때문에 화장실에서 문을 닫고 혼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저보다 한 학년 위지만, 4살이나 어린 선배에게 맞고도 제 자신을 잘 견디어 냈던 것은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때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다면 저도 주먹이 나갔고 상황은 더 크게 번져 나갔을 것입니다.


사. 나를 품어줄 따뜻한 가정이 그리울 때가 있다

때로는 나태해지고 게을러질 때마다 올바른 길을 가라고 채찍질을 하시던 부모님과 같은 분들이 제 옆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을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밤늦게 자율학습을 하고 함께 정문을 나설 때 다른 학우들은 부모님이 마중을 나와 격려를 해주고 차를 타고 함께 집으로 가는 모습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고, 아무리 수능공부 하느라 힘들더라도 부모님의 따뜻한 격려와 사랑이 있어 저 친구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부모님이 무척이나 보고 싶고 고향생각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북녘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곤 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많은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지만 정작 그 자유와 권리를 잘 다스리고 절제하고 인내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로움과 나태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 앞에만 서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데 그것을 해소하려고 학교 선도부에 자진해서 들어갔고 아침 일찍이 학교에 나와서 등교하는 많은 학생들 앞에서 그들의 흐트러진 점을 바로 잡아주고 제 자신도 모범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가 있었고 그 속에서 기쁨도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 남한사회의 현실이 나를 대학으로 등 떠밀다

과거에 연세대학교 수시 2차 전형에 지원했었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한 동안 슬럼프에 빠져, 사회생활을 2년 가까이 했습니다. 2년 동안의 짧은 경험이지만, 다양한 경험들을 통하여 책이나 강의에서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교훈들을 차분히 제 것으로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청량리 시장에서 과일도매, LG서비스센터에서 출장서비스 기사, 부동산기획사에서 텔레마케터, 이랜드에서 매장관리 등 2년 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저만의 작은 노하우를 차분히 쌓아 올 수 있었습니다. 실제 사회의 현장 여러 곳에서 일을 하면서 대한민국에도 얼마나 고달프게 사는 사람이 많은지, 또 나만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어렵고 힘든 이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대한민국도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빈익빈 부익부의 대한민국의 사회의 현실은 저를 더욱더 공부에 대한 열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공부하는 것이야 말로 북한에 두고 온 부모형제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건국대에 입학해 부동산학과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건국대 부동산학과에서 공부를 하면서 부동산이라는 학문을 경영학적으로 접근을 하여 더 광범위하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뚜렷한 목표의식과 도전정신은 연세대 편입시험에 합격을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 중에 있습니다. 지금 대학교를 다니면서 느끼는 점은 실패와 약점이라는 부족함이 있어 제가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학업에 임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마주하는 시간은 삶의 지혜를 배울 수가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김철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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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phzibah 2011-12-31 10:08:33

    2학년 담임선생님은 직접 저의 집에 사모님과 함께 찾아오셔서 집안 살림을 챙겨주시기도 하고 집기류 같은 것도 사주셨습니다. 또 제가 학교에서 주는 ‘참 인간상’을 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서울특별시 교육감상을 탈 수 있게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제가 잘나서 받은 상장이 아니라 남한에서 훌륭하게 정착하기를 바라는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어, 제게 너무나 소중한 상장입니다.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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