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가수 태진아의 히트곡 중에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가 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랑을 하려면 사람이 만나 눈이라도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다.

가사에 따르면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두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우선 만나야 한다. 만남이 바로 인간의 역사다. 하지만 만나고 만나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인간이 외로운 건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만남이 정(情)으로 이어져야 한다.

도처에 널린 사랑은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종교 자체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대부분의 종교가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교훈은 사랑이다. 내가 아는 목사님은 기독교 성경 구약 39장과 신약 27장 등 전체 66장의 두꺼운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 사상과 홍익인간 사상은 그 자체가 ‘사랑’이다. 인간의 심성인 사랑을 대표하는 사상인 셈이다.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는 정신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죽을 때까지도 사랑을 강조했다. 성경에 그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기록된 곳이 고린도전서 13장4절부터다. 이를 보다 쉽게 풀이해, 복음성가로 널리 불리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 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렇다. 성경의 기록처럼 사랑은 자기희생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누리거나 참지 않는다면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다. 지고지순한 종교적 사랑은 물론이려니와 남녀 간의 사랑도 기본적으로 내가 양보하고 이해하며 나를 내세우지 않을 때라야 순탄하게 지속될 수 있다.

고린도전서 내용은 기독교부흥의 제일 공신인 사도 바울이 ‘고린도(Korinthos)’에 있는 교인들에게 전한 말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 사람이었다. 죄 없는 예수가 희생적으로 죽어가는 것을 본 그는 결국 인간 사랑의 중요성이 자신에게 부각됨으로써 사랑의 위대함을 깨우친 사람이다.

그래서 정통 유대교로부터 사이비로 지목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에 앞장섰던 그는 스스로 죄인중의 죄인이라고 대오 각성했다. 그렇게 그는 ‘새사람’이 됐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그는 ‘죄인의 괴수’임을 자처했다. 그러니 그는 매일 죽어야 했다.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또한 예수의 가르침대로 자신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신이 존중받는 위치의 ‘옛사람’으로 그대로 있다면 사람을 사랑할 수 없기에 그는 “날마다 죽노라”고 다짐했다.

사도 바울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예수 사랑을 전도하고자 했던 고린도(Korinthos)라는 지역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로 아테네로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 쪽으로 78km정도 떨어져 있다. 지금은 인구 3만 명의 시골이지만 로마 시대에는 인구 60만 명의 모여 살았던 거대 항구도시였다. 이민족과의 교역이 잦아 부패와 탈선, 방탕과 타락의 면면이 강했다.

그곳에는 이스라엘에서 강제 이주된 유대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또한 당시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 재위 서기41년∼54년)의 반유대주의 정책(45~49년)에 따라 로마에서 고린도로 추방된 유대인들도 있었다. 그중 2만5000명의 유대인들에게 그는 예수의 ‘사랑’을 전도했다.

사도 바울이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로마에서 추방된 유대인 이민자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였다. 이들 부부는 천막 제조공장을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귀족 출신이자 로마시민권자인 바울은 그 공장에 취직을 하고, 천막 제조하는 일을 하면서 노동자 서민들에게 사랑을 전했다

그런 곳에서 사도 바울이 느낀 것이 바로 “사랑은 아무나 하나”였다. 역시 타락한 도시 에베소(Ephesus)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하려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은 바로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의와 진리의 길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성경에 적힌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하느님을 따라 ‘새사람’이 되는 길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어쩌면 단순하다. 즉 거짓말을 버리고 이웃에게 참된 것을 말하면 된다. 옹졸하게 해가 떨어질 때까지 화를 품지 말고 그 날 그 날 웃으며 풀면 된다.

또 열심히 일하면 된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도록 손이 수고하는 것이다. 또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서로 친절하며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면 모두 새사람이다. 그것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길이다.

그런 새사람이라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가장 으뜸인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의 가르침은, 공유의 정신과 참여의 문화를 가진 한국의 전통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새사람이 아닌 사람이 사랑을 한다는 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다. 아무리 사회에 몇 천억의 재산을 기부하고, 어깨띠 두르고 사회봉사하는 사진을 찍은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새사람이 바로 신인간(新人間)이다. 시인 김지하는 신인간을 홍익인간이라 표현했다. 홍익인간들이 많이 사는 한국에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시스템(SNS)이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SNS는 사람과 사람간의 만남이다. 디지털 시대의 총아라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한국이 전 세계에서 처음 개발한 ‘아이러브스쿨(iloveschool)’을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태진아가 사람은 우선 만나야 한다고 노래한 것처럼 한국은 사람이 서로 만나 소통하는 ‘사랑의 SNS’를 만들어냈다. 옛사람에 의한 옛사랑이 아닌, 새사람에 의한 새 사랑이 나올 수 있었던 홍익인간 사상이 1945년 해방 후 기독교를 적극 지원했던 미 군정청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으로 선포됐던 결과다.

예수가 반체제 인물로 몰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던 이유는 ‘새사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기존의 보복적 유대 율법을 추종한 이스라엘 기득권층이, 사랑을 강조한 예수에 의해 ‘옛사람’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극한적 표현이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까지 내 놓으라”는, 그래서 “원수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외침이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반드시 실천해야할 덕목이다.

이런 사랑이 지향하는 꼭짓점은 민족이 민족을, 국가가 국가를, 이념이 이념을 대적하는 전쟁이나 대립이 결코 아니다. 함께 번영하는 인류의 행복한 웃음이 온 세상에 가득한 홍익인간의 세계, 서로를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사랑’이 오신 것이다. 우리 서로 사랑하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배려와 이해로 서로 사랑하자! 홍익인간 사랑 만세!

노규수_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 해피런㈜ 대표이사. 2013년 포춘코리아 선정 ‘2013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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