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기 추모식과 함께 서성환 회장 일대기 주목

 
 
㈜아모레퍼시픽(대표이사 서경배)이 오늘 1월9일 창업자 故 서성환(徐成煥) 회장 영면 10주기를 맞아 장원재사와 인재개발연구원에서 선대 회장의 뜻을 기리고 소명 실천을 위한 의지를 다지는 장원(粧源) 서성환 회장 10주기 추모식 및 추모전 ‘아름다운 길’을 개최하면서 서성환 회장의 일대기가 다시금 조명되고 있다.

지난 2003년 1월9일 타계한 장원 서성환 회장은 1945년 창업 이래 올해로 68주년을 맞는 ㈜아모레퍼시픽을 일구어 낸 창업자로, 대한민국 화장품 역사의 선구자이자 아시안 뷰티(Asian Beauty)의 창조자, 차(茶)문화를 계승∙발전시킨 다인(茶人), 나눔과 실천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한 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지는 서성환 회장 영면 10주기를 맞아 1945년, 격동의 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던 청년 서성환이 걸어 온 ‘아름다운 미의 여정’을 따라가 보았다.

개성상인의 정신을 계승해온 기업가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자인 장원 서성환 회장은 1924년 7월 14일(음력),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신답리에서 서대근 공과 윤독정 여사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利川)으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고려 개국공신의 가문으로 알려져 왔다.

개성으로 이주한 서성환 회장은 개성 송악산 밑에서 창성상점(昌盛商店)이라는 잡화상으로 화장품을 취급하기 시작하다가 가내수공업으로 화장품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1939년부터는 부모님을 도와 가업인 화장품 제조에 참여하게 된다.

1941년에는 개성 김재현백화점에 입점하고 집에서 생산한 제품을 가져다 직접 판매하기 시작하는데 당시에 직접 제조와 소매를 병행하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때부터 하루 2~3시간만 자면서 1인 4역을 하며, 부족한 원료를 구하러 원산까지 다니는 등 화장품 사업에 전념했다.

해방 후 국내 경제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특히 제조업분야는 기반시설이 없는 상황이었다.

서성환 회장은 당시 화장품 업계 상황을 “당시 화장품 품질은 조잡한 것이 많아 크림의 경우는 날씨가 더우면 끓어 넘치고 로션은 기름이 분리되어 맹물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품질만 좋으면 얼마든지 팔리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한다. 창업자는 이때부터 품질향상과 최고 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최고 제품에 대한 열정으로 남보다 한발 앞선 신제품 개발

 
 
서성환 회장은 서울로 옮겨와 1947년 회현동(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너편 남산터널 입구 부근)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생산한 품목은 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안수, 구리므, 포마드 등이었는데 1948년에는 최초로 태평양의 상표명을 붙인 ‘메로디크림’을 발매했다.

원료부족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서울에서 사업이 자리 잡을 때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부산 초량동으로 피난하게 되지만 그는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서울에서 생산에 참여했던 직원들이 찾아와 내 일처럼 함께하고, 거래처에서 그동안 쌓인 신용과 신의로 우선적으로 원료와 용기를 공급 받아 사업에 안정을 기하면서 최초로 순 식물성 포마드인 ‘ABC포마드’를 발매(1951년)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낮에는 생산하고 밤에는 포장하여 부산뿐만 아니라 대전 대구까지 판매노선을 개척하였으며, 사업도 번창하였다.

서성환 회장은 화장품 유통사에 혁명적인 제도를 도입한 것 이외에도 작명(브랜딩)에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누구나 알기 쉽고, 부르기 편한 브랜드 작명을 선호했는데 그 예로는 태평양, ABC, 아모레, 타미나, 미보라, 나그랑, 탐스핀, 화니핀, 미로 등이 있다.

또한 ㈜아모레퍼시픽(태평양)의 광고는 한국 광고사에 많은 기록을 남겨왔는데 최초로 시도한 매체광고 방법(1970년 조선일보에 한국 최초 신문전면 컬러광고 등)과 새로운 광고기법(1950년대 국내 최초로 추정되는 ‘ABC CM송’, 1955년 장업계 최초 매체광고 ‘ABC 비듬약’, 1956년 장업계 최초 광고모델 기용 등)이 유명했다.

특히 화장품 광고모델전략은 제품홍보의 특성에 맞게 선정하는 세심한 면을 보였는데 초기에는 김보애, 최무룡, 이민자 등 당시 유명 연예인을 기용하는 전략과 시장을 주도할 때는 주미, 금보라, 황신혜, 옥소리, 이영애 등 신인 모델을 발굴 육성함으로 태평양의 모델은 연예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소비자를 속이지 말고 소비자에게 더 큰 이익을 주도록 하라” 

 
 
㈜아모레퍼시픽(태평양)이 창립 이래 업계 1위를 굳건히 지켜왔던 것은 기술우위로 품질이 우수한 신제품을 내놓아 소비자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받았고, 서성환 회장이 항상 “소비자를 속이지 말고 소비자에게 더 큰 이익을 주도록 하라”고 강조하며 소비자에게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갔기 때문이었다.

그 사례로써 국내 최초 사외보인 월간 미용정보지 <화장계> 발간(1958년, 현 <향장>), 미용상담실 개설(1961년), 미용사원제도 도입(1963년), 장업계 최초 소비자 전담 부서인 소비자과 창설(1974년), 미용지식 대중화를 위한 뷰티센터, ‘아모레 1번가’ 개설(1984년), 메이크업 시뮬레이션 시스템 개발(1987년)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향상과 만족을 주기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미용관리를 위한 단계별 피부손질법 정립(1968년), 국내 최초 메이크업 캠페인 ‘오! 마이 러브’(1971년) 등을 통한 화장문화 선도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 전통 차 문화를 정립하고 싶다”

 
 
서성환 회장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는 것이 차(茶)사업 진출이다. 1970년대 중반 서성환 회장이 차사업을 시작할 당시, 녹차를 마시는 인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으며, 녹차의 생활화는 마치 바위에 계란 던지기처럼 무모하게 여겨져 임원진들마저 반대를 많이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茶)사업을 일군 서 회장은 당시를 “어느 나라를 가 보아도 나라마다 각각 독특한 차가 한가지씩 있는데 우리나라는 뚜렷이 내세울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 사업만은 누군가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꼭 한국을 대표하는 차로 자리를 굳힐 생각이었다”고 회고했다.

다원 조성을 추진하면서 서성환 회장은 막막하고 암담한 상황에서도 돌과 잡초만 무성한 불모지의 땅을 옥토로 바꿔 녹색혁명을 이룩했다.

이는 한 기업인의 사명감과 개척정신으로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녹차의 생활화를 위한 백만인 무료시음운동을 비롯하여 월간 잡지 <설록차> 발행(1983년), 국제 녹차 심포지움, 차문화를 육성하기 위한 다예강좌 등 지속적인 계몽활동을 실시하였다.

이와 함께 그의 강한 집념과 평생의 차(茶)문화 사업을 정리하는 설록차 뮤지엄 오’설록(2001년)을 제주에 개관함으로써 관광명소의 역할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 차문화를 해외 관광객에 알리면서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가지고자 했다.

지속적인 투자로 우리 고유의 전통차인 녹차의 품질을 높이고, 녹차를 대중의 생활차로 발전시켜 전통문화를 계승해온 서성환 회장이야말로 진정한 다인(茶人)이라 하겠다.

“소비자를 위해 소비자와 함께 성장하는 기업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서성환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기업인이었다. 그리고 인류에 봉사한다는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윤리를 실천했다.

1963년부터 ‘성환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중앙대학교에 기부하기 시작한 서성환 회장은 1973년 태평양장학문화재단(현 아모레퍼시픽재단)을 설립하여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 학술연구지원사업, 여성생활문화를 개척하는 논문공모 사업 등을 전개했다.

이후 육영사업에 뜻을 두고 학교법인 태평양학원을 설립(1976년)했으며, 국내 최초의 기업박물관인 태평양 화장사관(현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을 개관(1979년)하였고, 헤어, 의상, 주택 등 9개 분야의 한국 생활문화 100년을 정리, 편찬(1995년)하여 학문적 연구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화장사관은 우리나라 고대부터 대한제국시대까지 각종 화장품 용기와 화장용구, 장신구들을 통하여 한국인의 화장과 화장품의 변천사를 조명해낸 박물관으로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에서 유일한 화장품 박물관이었다.

또한 다예관(1981년 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 박물관으로 한국 차문화 구명(究明)에 앞장 서 왔는데,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 영정과 친필 저서인 우리나라 유일의 다예서, 동다송(東茶頌) 등을 소장했다.

이와 함께 서성환 회장은 태평양 박물관 소장명품 특별전(1987년), 전국 9개 지역 순회전(1988년) 등을 개최하고, 전통문화 창달에도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통 화장문화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서성환 회장은 사회복지사업에도 관심을 갖고 1982년 사회복지법인 태평양 복지재단(현 아모레퍼시픽복지재단)을 설립했다. 태평양복지재단은 사회복지시설 지원사업과 후생복지사업, 사회복지 학술연구비 사업 등을 이어갔다. 또한 저소득 계층의 교육기회 제공을 위한 장학사업도 전개했다.

아름다움과 건강을 위해 오직 한 길을 걸은 선구자

 
 
서성환 회장은 아호인 장원(粧源)이라는 말 그대로 화장품 업계에 원조요 업계 일인자로 평가받는다. 이는 그만이 가진 특질과 외유내강형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장원은 최초와 최고를 추구하면서 집요하게 도전하는 자세와 개척정신을 유지했으며, 기업을 하면서 인류와 사회, 소비자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사명감을 갖고 실천해왔다.

또한 항상 겸손하면서도 근면하고 정직한 태도로 솔선수범해 왔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서 실패한 직원은 반드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포용력이 있었다. 조향기술에 대한 지식의 전문성과 감각은 연구원들도 자문을 구할 정도로 해박하였으며 제품에 대한 탁월한 열정 또한 가지고 있었다.

한국경영대상 한국의 경영자상 수상(1984),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2004), 한국의 인물 기념메달 등 수많은 수상의 의미는 그의 업적에 대한 인정과 아울러 한평생 아름다음과 건강을 창조해 오직 한 길을 걸어온 기업인에 대한 영원한 귀감을 삼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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