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우리나라 학교는 3월 학기제다. 그래서 1월1일이 아닌 3월1일이 새 학년(學年)의 시작일이 된다. 하지만 초중고 대학시절 모두 3월1일에 등교해본 적이 없다. 삼일절이 공휴일이기 때문에 늘 3월2일이 개강일이었다. 삼일절에 대부분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게 되지만, 대학시절부터 나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더 생각하게 되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종로결찰서 고등계 형사출신인 신철(申哲)이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으로 일본군(순경, 헌병)에 사살당한 우리 국민의 수가 75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부상자는 1만5961명이다. 당시 2000만 국민 중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라고 하니, 오직 맨손뿐인 식민지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시위에 가담한 상황으로는 놀라운 규모다.

3.1운동의 거사 일을 3월1일로 잡게 된 것은 당시 일본 유학 중인 600여명의 조선 학생들이 동경에 모여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작성한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날이 2월8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3.1운동의 주역들인 민족대표 33인의 입장에서 보면 적국의 심장부에서 터진 조선 독립운동의 열기가 채 식기 전에 우리 땅에서 다시 점화해 지속적인 민족운동으로 이어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나돈 고종의 장례식이 3월3일이어서 전국에서 애도 인파가 속속 서울로 몰려들고 있어 3월3일을 거사일로 삼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혈충돌로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조선의 마지막 황제였던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의견에 묻혀 3월1일로 앞당겨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이 3월1일에 일어난 그 배후에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역할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거사 일을 사흘 앞둔 2월26일 저녁 무렵이었다. 어스름이 어둠이 깔리는 서울 안국동 사거리 근처에 한 사내가 땅 밑을 바라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이었다.

그는 악질 중의 악질 형사였다. 그에게는 일본경찰이 키운 사냥개 1호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종로경찰서 10년의 경력으로 사냥개와 같이 예민한 후각을 갖고 우리 애국지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손금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날 그는 발밑으로 들려오는 어떤 기계음 소리를 육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순간적으로 옆 건물인 보성사(普成社)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천도교에 소속된 인쇄소였다. 불빛은 없었다. 하지만 닫힌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불빛이 환했고 윤전기에서는 무엇인가 인쇄 중이었다.

인쇄공들을 향해 권총을 들이대고 인쇄물을 빼내 보니, 종로경찰서가 혈안이 될 정도로 시위 증거를 찾고 있던 ‘조선독립선언서’였다. 인쇄소를 급습당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 33인의 한 사람)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러나 신철은 선언서 한 장을 챙겨들고 아무 말 없이 인쇄소를 나갔다고 한다.

이종일은 즉시 천도교 유력자인 최린(崔麟)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최린은 자신의 집에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은밀히 신철을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최린은 신철에게 민족을 위해 며칠 동안만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때 최린은 그에게 5000원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도 한다. 당시 쌀 한 가마니의 값이 41원이었고, 상머슴의 1년 연봉이 쌀 10가마니 정도였기 때문에 5000원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후일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 특히 애국지사들의 증언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갔다고 되어 있다. 어쨌든 최린의 집에서 나온 신철이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3·1운동 모의는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결국 만세운동 지도부에서는 보안상의 심각성을 고려해 3월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신철은 곧 만주에서 신의주로 독립단이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며 신의주로 출장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만세운동이 진압될 무렵에 일본 경찰은 그가 배신했다는 것을 알고 5월14일에 서울로 압송해왔다. 결국 3.1운동 정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성헌병대에 투옥됐고, 거기서 그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것이 매일신보 1919년 5월22일자의 기록이다.

그렇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던 것이다. 또 여름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저렇게 울어야 했고, 가을 간밤에는 무서리가 저리 내려야 했으며, 그 꽃을 보기 위해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악명 높은 일본 고등계 형사 신철은 자살로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 한국의 근대 시민운동이 처음 발생하고, 100년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국경일로 기념하게 된 3.1운동의 이면에는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에 의해 얽히고설킨 수많은 사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3.1운동에 대한 평가는 참여한 사람들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각각 다르겠지만, 그 운동을 주관한 세력은 천도교의 손병희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종단 지도자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그래서 3.1독립운동 사상은 먼 옛날 천손민족이 일어나 조상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다.

세계사적으로도 홍익인간 사상은 인류 최초의 인본주의 선언이자 평화정신이라고 말한다. 세계 3대 시민혁명이라는 1648년 영국의 청교도 혁명, 1775년 미국의 독립혁명,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주장한 인권평등과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은 모두 홍익인간 정신과 일치하는 덕목이다.

그 홍익인간 정신으로, 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본주의 정신으로,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과 동학혁명, 1904년의 갑진개화운동이 일어났었고, 1912년에 이어 갑인년인 1914년에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었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이 바로 1919년의 3.1운동이었던 것이다.

평소 악명 높던 친일파 형사였을지라도 신철은 3.1운동이라는 민족의 대역사 앞에서,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것이 나의 평가다. 그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결국 목숨을 건 승부수를 던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것이다.

지난 과오를 깨달았다면 누구나 당연히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건 승부를 벌일 줄 알아야 한다. 나와 독산 가산동 친지들은 10여 년 전부터 이 땅에 불법 다단계·방판을 없애기 위해 과감히 인생의 승부를 걸고 있다.

우리의 정신적 좌표는 3.1운동 정신과 같은 홍익인본주의의 실현에 두고 있다. 이미 2년 전 봉천동에서 목숨을 건 도전장을 던지고 다짐했다. 행복나무 과수원을 이 땅에 열고 행복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때까지 시민혁명을 위해 뛰겠노라고. 

노규수_ 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 해피런㈜ 대표이사. 2013년 포춘코리아 선정 ‘2013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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