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규수(해피런㈜대표이사)
▲ 노규수(해피런㈜대표이사)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역사의 가설이 하나 있다. 신라 대신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더라면 우리나라의 영토가 만주를 포함해 시베리아까지 넓어졌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그런데 신라가 통일의 주역이 되는 바람에 대동강과 원산만 남쪽만 차지하게 됐다고 아쉬워한다. 잃어버린 땅에 대한 한탄이다.

일부는 그런 미련을 아직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가 모든 것을 보여 준다’는 것 또한 나의 생각이다. 신라가 통일했다는 그 ‘결과’는 군사력과 정치력은 별개라는 또 하나의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군사력만 본다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해서 그들 나라를 미국에 편입시키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 코앞에서 늘 말썽을 피우는 쿠바 정도는 당장 한입에 삼켜버려도 될 만큼 간단한 작업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점령 그 이후다. 힘으로만 상대를 지배할 수 없는 것이 인간세계다. 상대가 인정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하다. 미국은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2001년 10월 전쟁에 들어가 반미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정권을 세웠지만 지금까지 모두 2천여 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다. 게릴라 세력인 탈레반은 아직도 미국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지난 3월19일로 이라크와의 전쟁 10주년을 맞은 미국은 승전국이 아니다. 독재자로 지목한 사담 후세인을 처형했지만, 그 대가로 미군 4천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2조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2200조원을 날렸다. 앞으로 이라크를 유지하려면 또 2조 달러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도합 4조 달러면 금년도 우리 정부예산이 342조원이니 우리나라를 13년 동안 운영할 수 있는 막대한 돈이다.

이라크 피해도 컸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이라크인은 민간인을 포함해 17만6000~18만9000여 명으로 추산됐지만 조사기관에 따라서는 40~50만 명으로도 올라간다.

하지만 미국이 진정으로 잃은 것은 돈과 사람이 아니라 이슬람에 몰아친 반미와 반기독교 감정의 확산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절대 군사력만으로 이들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는 미국의 꿈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은 졌다’라는 교훈, 포린폴리시(FP)가 분석한 ‘이라크에서 얻은 10가지 교훈’의 제1조다.

2005년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지난 60년간 미국이 중동국가에 민주주의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안정을 얻으려 했지만, 둘 다 이루지 못했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미국이 겪고 있는 딜레마의 순수한 고백이었다.

2012년 8월 하와이 복귀를 20일 앞둔 그레고리 상병(당시21세)은 근무지인 아프가니스탄 헬만드 주의 부대 내에서 자신이 직접 훈련시키던 아프간 보안군 소속 병사가 쏜 총에 동료 미군 2명과 함께 희생됐다. 탈레반이 아닌 정부군에 당한 것이다. 미국 군사평론가들은 이것을 ‘내부자공격’이라고 표현했다.

3달 후면 하와이 집으로 돌아온다고 아들의 연락을 받았던 그레고리 상병의 어머니 마리나 버클리는 피눈물을 토해야 했다. 그는 “미군은 그곳(아프간)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전쟁은 끝나야 한다. 더는 안 된다”고 울부짖었다.

다시 고구려로 가보자. 나는 여전히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만주 시베리아까지 우리 땅이 됐을 것이라는 희망적 가설을 지지하겠지만, 또 다른 가설을 제기하고 싶다. 고구려가 무리하게 삼국통일을 하려고 시도했다면 현재의 우리 국토가 중국 땅에 편입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서로 ‘우리 끼리’ 싸웠다면 모두 당나라의 먹이가 될 수 있었다는 가설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에 나설 시기는 고구려가 최강의 전성기 때일 것이니 광개토대왕 시절로 되돌아가야겠다. 고구려가 삼국경쟁의 주도권을 잡은 5세기에 광개토대왕은 주로 요동지방을 비롯한 만주 지역에서 정복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당시 강국이었던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남으로 몰아냈다. 내 고향인 서울 광진구 구의동 부근 아차산성에 고구려 유적이 보이는 대목이다. 그 후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백제와 신라에 압력을 가하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공동대항하기 시작했다.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는 이 시기 강대했던 고구려의 세력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 정도에서 멈췄다. 더 이상은 곤란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해 한성을 함락시켰다고 해도 그것이 백제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멸망 후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등이 일으킨 백제부흥군, 즉 게릴라군은 멸망 당시 백제가 동원할 수 있었던 4만5000명 병력 그 이상이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시절의 백제는 결코 약소국이 아니었다. 정규부대는 물론 지방에 근거한 호족세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당시 백제의 인구는 고구려보다 많았다고 한다. 땅만 넓었지 이렇다 할 생산기반과 연결 네트워크가 부족했던 고구려에 비해 호남과 경기의 곡창지대를 소유하고 있던 백제는 백성 부양력도 높았고, 그래서 인구나 경제력 면에서 모두 고구려를 앞서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군사력만 믿고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기마병을 동원해 속전속결로 백제를 정복하고자 했다면, 미국이 후세인을 제거시키듯이 백제왕을 제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방 호족들이 보유하고 있는 백제 저변의 힘까지 모두 분쇄시킬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또 승산이 불확실한 백제와의 전쟁에 빠져들면 중국이나 북방 돌궐족의 침략,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의 개입 등으로 고구려 자체가 위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광개토대왕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야 군사력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상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인정할만한 통치이론과 고도의 정치력이 있어야 함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은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이익을 취하는, 즉 고구려의 내실을 기하는데 주력했다.

실제 역사학자들이 밝히는, 광개토대왕에 대한 기록을 보더라도 그가 단순히 영토를 넓히고자 전쟁을 했다기보다는 내정의 일환으로서 고구려의 내실을 보다 탄탄히 다지고자 전쟁이라는 수단을 썼다고 한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결국 고구려의 힘과 논리가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삼국통일을 하려고 해도 전쟁 수행과 관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광개토대왕은 그것을 알았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실을 기해 나갔지만, 결국 고구려는 660년대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와 그로 인한 국론분열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북쪽을 고구려가 막고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신라가 당나라의 위협을 극복하고 대동강 이남의 땅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중국이 대대적으로 우리나라를 병합시키기 위해 나섰던 첫 번째 전쟁은 613년 중국을 통일한 수 양제였다. 그러나 살수에서 을지문덕에 패했고 결국 수나라도 멸망했다. 이후 645년 당 태종이 수나라 원수를 갚고, 원래 ‘중국 땅’이었던 요동(고구려)을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한반도 정벌에 나섰지만, 진입로 입구인 안시성에서 양만춘에 패하고 만다.

668년 당시 세계 최강국인 당나라가 고구려를 쓰러뜨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신라와의 연합작전이 필요했다. 만일 당나라 혼자의 힘으로 고구려를 정복할 수 있었다면, 곧 신라와 백제까지 일거에 흡수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토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갔을 것이다.

중국은 조공을 받던 주변 소수민족들의 영토를 차츰차츰 자국에 편입시켜 왔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영토를 보존한 독립국가로 남아 있다. 우리야 우리가 독립국가라는 것이 당연하지만, 세계인의 눈으로 보면 중국의 변방 약소국 중의 하나가 중국에 흡수되지 않은 것을 세계 외교사의 연구과제로 보고 있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한 것도 아쉽다. 하지만 고구려로 인해 신라가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결국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현재 영토를 지켜낼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부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그것이 역사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역사는 그렇게 묘한 균형 감각을 만들어 낸다.

바로 4월5일, 음력 2월25일이 1345년 전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날이다. 이 날은 또 2년 전 우리 친지들이 ‘홍익인본주의’라는 개혁적 자본주의를 제시한 날이기도 하다. 나는 전쟁이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경제시스템이 앞으로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을 이루고, 투쟁과 반목이 아닌 모두가 화합하여 새 시대를 열어줄 공동번영의 논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노규수_ 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 해피런㈜ 대표이사. 2013년 포춘코리아 선정 ‘2013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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