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570여 년 전 조선 세종 때에 예정에 없던 과거시험을 치른 일이 있다. 요즘으로 치면 특별전형을 한 셈이다. 사연은 이렇다. 세종이 1436년 봄 농사철을 맞아 지금의 서울 서교동, 망원동 일대로 시찰을 나간 일이 있었다.

서교(西郊. 도성 서쪽 현재 신촌일대의 들녘)에서는 농사짓는 농부들을 격려하며 술을 내렸고, 희우정(喜雨亭. 효령대군이 세운 정자. 현재 양화대교 북단 양화진 서쪽 강변북로 옆에 있는 망원정)에 이르러 한강을 지키는 수군들이 화포 쏘는 것을 보고 돌아설 무렵 유생 282명이 길가에 늘어서서 자신들에게 한성시(漢城試)라는 과거시험 응시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치면 학생시위가 벌어진 셈이다. 그들의 말은 ‘기회의 균등’ 차원에서 한성시를 부활해달라는 것이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 때에는 성균관 유생들만 과거를 치를 수 있는 관시(館試) 이외에 서울 각 지역에서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한성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더구나 뛰어난 인재가 어찌 관시에서만 나오겠느냐, 밝은 사람을 밝혀내고 숨어있는 이를 드러내어 어진 사람을 세우는 것에는 한도가 없어야 한다며 옛 성현의 말을 들먹이며 조목조목 따져드니 세종은 한성시와 같은 향시, 즉 지역별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학생 282명은 결코 작은 인원이 아니었다. 그 시위 주동자로 나선 젊은 선비가 바로 강희(姜曦)라는 인물이다. 그는 말로만 떠들어댄 것이 아니라 제대로 실력을 발휘했다. 그때 치러진 한성시에서 당당히 차석(2위)으로 급제했고, 이후 이조정랑이라는 요직에 기용됐다는 기록도 있다.

강희(姜曦)의 호가 바로 독산(禿山)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왜 호를 하필이면 대머리 독(禿)자를 써서 ‘대머리산’이라고 지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내 집 뒤에 산이 있는데 벌거숭이산이 됐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 산을 독산이라고 한다. 원래는 나무가 있었으나 도성 교외에 있는 까닭에 재목으로 쓴다하여 도끼로 찍히고, 소·염소 따위에서 먹힘을 당하여 벌거숭이가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1019년에 거란족인 요나라가 침략했을 때 10만 명에 가까운 적을 섬멸한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후손이기도 했다. 강감찬 장군의 직계 후손들이 바로 금천구(衿川區. 당시는 금천현)에 모여 살아 금천 강씨로 불린다. 강희는 고향 금천의 산에 나무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자신의 호를 독산이라 하여 널리 부르게 했던 것이다.

그가 죽고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산과 나무사랑을 위한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서울 금천구에 독산역과 독산동이라는 지명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강희가 살던 금천은 그렇게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삶의 중요성을 조선팔도에 널리 알려온 고을이었다.

따라서 나무가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조선의 자연주의 철학은 홍익인간이라는 위대한 사상과 연계되어 있었다. 나무를 통해 자연력을 복원함으로써 인간생활에 유익하고 윤택한 환경을 조성하자는 것이 ‘자연주의자’ 독산(禿山) 강희(姜曦)의 외침이기도 했다.

조선왕조 시대에도 생활에 필요한 나무심기가 장려되었다. 선박용, 건축재, 연료재, 도구재료, 구황작물 등 경제적으로 유용한 목재 및 산림부산물의 지속적인 확보라는 측면에서 나무심고 가꾸기는 국가적인 관리 대상이었다. 또한 가구도료로 쓰이는 옻나무, 종이(한지)를 만드는데 쓰이는 닥나무, 누에를 치는 데 쓰이는 뽕나무 등 생활에 필요한 유용수종을 심고 관리하는데 조정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나무는 또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식량 걱정을 안 하고 사는 나라가 됐다고 하지만, 196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흉년이 들 때는 물론이요, 보릿고개라는 4~5월 춘궁기가 오면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던 궁핍한 나라였다. 그래서 각 지역별로 흉년의 식량부족을 대비하기 위해 밤나무 잣나무 감나무 등은 물론 도토리묵을 쑬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내가 어렸을 때인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시절에도 대대적인 산림녹화 운동이 벌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고향, 서울 광진구 구의동 뒷산인 아차산과 용마산에도 4월5일 식목일이면 인근 마을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해 나무를 심었는데, 어른들의 말씀으로는 그 식목 행렬이 아차산 최북단인 망우리 공동묘지 지역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어릴 때부터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2009년에 서울을 떠나기로 작심하고 충청도 수안보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산에서 약초를 심은 것이 계기가 돼 자미원이라는 약초밭을 오늘도 동료들과 함께 가꾸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말이 약초일 뿐이지, 약재로 심고 가꾸는 것은 대부분 나무뿌리이고 열매다. 미국이나 중남미에서 아사이베리나 블루베리를 심고 가꾸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열매나무들이 자라는 수안보의 자미원을 ‘행복나무과수원’이라는 별칭으로 함께 부르고 있다.

내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행복나무과수원에 대한 꿈을 처음 간직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불법다단계추방 시민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으니, 수안보 산속으로 들어가기 8년 전부터였다.

당시 서울 테헤란로는 삭막한 독산, 즉 대머리 산이었다. 불법 다단계판매나 유사수신 업체에 잘못 빠졌다가 순식간에 알몸뚱이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내가 번뜩 생각한 것이 바로 행복나무과수원이었다. 불법 다단계판매 피해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모여 각자 과일나무 한그루씩 심고 땀 흘려 가꾸어 나간다면, 장차 거대한 행복나무과수원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과일나무의 장점은 한번 심고 가꾸면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 과일을 딸 수 있다는 점이다. 채소나 일반적인 농산물은 매년 논과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싹을 키워 가꾸어야 수확하는데 비해 과일나무는 한 번 심어 놓으면 반영구적인 소득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원리로 고민 끝에 개발한 비즈니스 모델이 바로 ‘소셜 네트워킹’이다. 전례 없는 획기적인 마케팅방식이라 하여 특허를 받고, 고객감동그랑프리 대상에 이어 신지식인과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로 과분한 선정을 받을 수 있었던, 그런 나의 이론적 틀을 쉽게 설명한다면 바로 과수원 영농방식인 셈이다.

그것은 누구나 영농조합원이 될 수 있고, 벌거숭이 독산(禿山)에 사과나무를 심던, 배나무를 심던, 포도나무를 심던 과일나무 한 그루씩을 심고 가꾸는 일이다. 노동력을 집중할 수 있는 일종의 협동농장이니 병충해 방제나 태풍피해 방지 등은 전체 영농조합원들이 모여 공동으로 작업할 수 있고, 수확도 함께 한다.

행복나무과수원의 미래를 위해 나무는 계속 심어져야 한다. 그래서 새로 들어오는 영농조합원이 자신의 과일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면, 심지 않고 가꾸기만 하는 사람에 비해 수확의 몫이 커진다. 자신이 심은 나무의 주인은 당연히 자신이다. 그 과일의 판매에서 나오는 수익금 배분의 1순위도 바로 그 사람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반영구적인 소득의 1등, 상위 1%를 보장할 수 있는 곳이라 행복나무과수원으로 부르게 됐다. 사업의 들러리가 아닌 주역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나무을 가꾸어 나가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벌거숭이 독산(禿山)은 곧 과일나무 숲으로 푸르게 변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나무과수원에서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우리나라 식목일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3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신라는 문무왕 10년부터 8년간 당나라와 싸워서 문무왕17년(서기 677년) 음력 2월25일에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밀어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했다.

그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 바로 4월 5일이다. 삼국통일의 그날을 기념해 나무를 심었던 것이 식목일의 처음 유래라 할 수 있다. 이제 행복나무과수원이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성을 복원해주는 휴머니즘(홍익인본주의)으로 새로운 통일을 준비할 차례다. 그렇게 나와 친지들이 독산(禿山)의 주역이 될 것이다.

노규수_ 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해피런㈜ 대표이사. 2013년 포춘코리아 선정 ‘2013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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