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와 책이 말해주는 휴식
책가도를 넘어 조형으로 확장된 The Book
미술과 공간이 만나 탄생하는 새로운 조형

최서원 작가/ 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최서원 작가/ 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뷰티한국 박솔리 기자] 최서원 작가의 출발은 “언젠가 꼭 작가가 되겠다”는 다짐이 아니었다. 그저 종이 한 장, 연필 한 자루가 손에 쥐어지는 순간, 그녀의 세상은 고요해졌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야심도,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선언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좋았고, 그 좋아함을 오랫동안 곁에 두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조용한 지속이 어느 날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이름이 다가왔다. ‘작가’. 개성과 취향이 존중받는 시대가 그 이름을 더욱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물론, 작업이 버겁게 느껴지는 날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캔버스 앞에 선 순간만은 예외다. 세상의 소음이 천천히 가라앉고, 색과 선, 화면과 마주한 그 시간이 늘 그녀를 가장 고요하고 가장 행복한 자리로 데려간다.

그곳이 바로, 최서원 작가가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만의 ‘슈필라움’이 시작되는 자리다.

소녀의 소망이 빚어낸 ‘슈필라움’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유년 시절, ‘온전히 나만의 공간’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 사치에 가까웠다. 남매와 함께 쓰는 방에서 자라다 보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방을 갖는 꿈은 점점 더 간절해졌다. 소녀 시절, 친구의 예쁘게 정리된 방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마음속에는 오롯이 자신의 취향으로 채운 이상적인 방에 대한 상상이 쌓였다.

누구나 가진 결핍의 존재. 최서원 작가의 결핍은 핵심 시리즈인 ‘슈필라움(Spielraum)’으로 응축됐다. 독일어로 ‘나만의 놀이 공간’을 뜻하는 이 단어는 더 이상 하나의 언어를 넘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상적 공간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작가 개인의 결핍을 넘어, 현대를 사는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개인 공간에 대한 집단적인 욕망까지 함께 담아낸 서사이기도 하다.

책가도와 만난 이상적 공간, 〈The Book〉으로의 확장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슈필라움’ 시리즈는 개인적인 ‘방’의 서사이자, 모든 현대인이 바라는 ‘나만의 이상적 공간’에 대한 비유다. 이 시리즈에서 빠지지 않는 오브제가 바로 ‘책’이다. 한국화와 민화를 전공하며 수많은 화목을 접하던 시기, 특히 책가도와 책거리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전통 회화 속 책가도의 모티프는 작가의 손에서 현대적인 책가도로 재해석되었다. 슈필라움의 오브제로 자리 잡은 책 이미지는 회화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점차 〈The Book〉 시리즈로까지 확장된다. 회화 속에 놓여 있던 책이 조형물의 형태로 공간 속으로 튀어나와, 입체적인 오브제가 되어 서서히 새로운 ‘공간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최서원 작가/ 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최서원 작가/ 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그럼에도 불구, 고독을 견디는 가장 확실한 방법…작업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어느 정도의 고독을 감수하는 일과도 닮아 있다. 작업실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밀려오는 날이 있다. 유난히 그 감정이 참기 힘든 날에는 햇빛 좋은 시간대에 일부러 산책을 나가거나, 책 한 권을 들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을 가장 확실하게 이겨내게 만드는 방법은 언제나 작업이다. 음악의 볼륨을 조금 높이고, 눈앞의 화면과 오브제에 온전히 몰입하다 보면 ‘외롭다’는 생각 자체가 서서히 사라지고 다시 그녀의 세계가 시작된다. 붓질과 손의 반복적인 움직임, 색과 질감의 변화가 마음의 리듬을 다시 맞춰주는 셈이다.

한국적 정서를 담은 이미지, 우리의 이야기가 되다
최서원 작가의 작업에는 일관된 방향성이 있다. 화면 속 이미지는 언제나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작품에 한국 고유의 정서를 담아 공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이미지들이 관람자의 기억과 추억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키고, 서로의 경험을 떠올리게 만들기를 바란다. 그렇게 각자의 기억이 작품 앞에서 맞닿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누군가에게는 응원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품을 지탱하는 중요한 동력이다.

[슈필라움 No.26]  Mixed media on canvas 162.2x260.3/ 2023
[슈필라움 No.26]  Mixed media on canvas 162.2x260.3/ 2023

책과 온전한 휴식, 두 개의 중심 축
최근 작업의 주제는 더욱 분명해졌다. 키워드는 ‘책’과 ‘온전한 휴식’이다.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바쁘고 지친 모두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쾌적한 공간에서의 쉼”이라는 확신이 커졌다. 온전히 쉬는 시간은 사람을 너그러워지게 만든다. 그 너그러움이 좋은 에너지로 이어지고, 결국 사회를 조금 더 평화롭게 유지하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책 역시 이 맥락 안에 놓인다. 책에서 얻는 지식과 지혜가 우리의 삶을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들고, 서로에게 건네는 위로와 다독임이 책을 통해 더 깊이 공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완성이란, 30년 뒤에도 조심스러운 말
작가에게 ‘완성’은 여전히 쉽지 않은 단어다. 예상했던 이미지 이상으로 작업이 잘 나왔을 때 아주 잠깐 “됐다”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에는 “어디에서 멈춰야 할까”라는 고민이 더 크다. 채워 넣는 것보다 비워내는 것이 훨씬 어렵게 느껴지고, 어느 지점에서 붓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난제다. 아마 30년이 흐른 뒤에도 ‘완성’이라는 단어를 쉽게 입 밖에 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작업은 매번 현재진행형으로만 존재한다.

[슈필라움 No.27] Mixed media on canvas 162.2x130.3/ 2023
[슈필라움 No.27] Mixed media on canvas 162.2x130.3/ 2023

경계에서 피어난 두 개의 결정적 순간
최근 작업 중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은 슈필라움 No.27과 The Book No.21이다.〈슈필라움 No.27>은 작가의 작업에서 책가도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자리한 작품이다. 색과 면, 선만을 이용해 단순화한 화면 구성으로, 주제를 더욱 또렷하게 부각시키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점이기도 하다.〈The Book No.21>은 책가도의 책을 조형물로 확장한 작업으로, 마띠에르 기법을 활용해 깊이감을 표현한 작품이다. 공간과의 조화를 치밀하게 고려하여 제작된 오브제로, 더 이상 벽에 걸린 이미지가 아니라, 관람자의 동선 속에서 호흡하는 하나의 공간 장치로 기능한다.

[슈필라움 No.28] Mixed media on canvas 162.2x130.3/ 2023 [슈필라움 No.33] Mixed media on canvas 162.2x112.1/ 2024
[슈필라움 No.28] Mixed media on canvas 162.2x130.3/ 2023 [슈필라움 No.33] Mixed media on canvas 162.2x112.1/ 2024

의자와 책, 쉬고 비상하기 위한 장치
작가의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상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슈필라움 시리즈의 ‘의자’, 그리고 The Book 시리즈의 ‘책’이다. 슈필라움은 나만의 공간에서 온전한 휴식을 취하는 상황을 상정한 만큼, 의자는 가장 핵심적인 오브제다. 의자는 “이곳에서는 잠시라도 편안히 쉬어도 좋다”라는 신호와도 같다. 반면, 책은 지식과 지혜를 통해 삶이 조금 더 ‘비상’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도 의자와 책은 부와 명예, 성공과 출세를 상징해 왔다. 작가는 이러한 의미들을 현재의 정서와 결합해 재해석하며, 화면과 공간 속에 반복적으로 배치한다.

평면에서 설치로, 더 깊어지는 실험
기술적, 재료적 변화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2022년, 이태원 몬드리안 호텔의〈갤러리 유니즌〉초대전에서는 한 작품을 그대로 설치 작업으로 재현하여,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포토 존으로 활용하도록 구성한 경험이 있다. 이후 The Book 시리즈에서는 책가 속 책을 아예 조형물로 확장하고, 마띠에르 표현으로 깊이감을 더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작품의 표현력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실험하고, 새로운 질감을 연구하는 과정은 현재진행형이다. 화면 안의 장면에 머물지 않고, 관람자가 “들어가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작품을 확장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인간의 감각을 믿다
디지털 아트와 AI 아트가 빠르게 확산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최서원은 여전히 인간의 예술적 감각을 신뢰한다. 디지털 및 AI 기반의 결과물은 결국 기존 데이터를 종합해 만들어진 하나의 변주라고 바라본다. 그리고 그 데이터의 원천은 여전히 인간이다. AI의 진화 속도를 고려하면, 지금 상상하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결과물이 등장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 작가는 “예술적인 영감과 감각은 또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는, 다소 보수적일 수 있는 생각을 품고 있다. 손과 눈, 몸으로 축적된 감각의 시간 자체를 쉽게 대체할 수 없다는 믿음이다.

미술과 공간이 만나 탄생하는 새로운 조형
최근에는 시대의 흐름과 공간 구성의 경향을 함께 읽어가며, 매우 심플하고 미니멀한 분위기의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작품에 주목하고 있다. 주거 환경과 생활 패턴이 빠르게 변화하는 만큼, 미술품이 공간 안에서 맡게 되는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공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작품의 방향성이 더 명확하게 보이기도 한다. 앞으로는 작은 오브제 형태의 다양한 조형물을 만들어, 공간과 예술이 서로를 더욱 섬세하게 완성해 주는 관계를 구축해 보고자 한다.

[The book No.15] Mixed media on canvas 130.3x162.2/ 2024 [The book No.16] Mixed media on canvas 130.3x162.2/ 2024
[The book No.15] Mixed media on canvas 130.3x162.2/ 2024 [The book No.16] Mixed media on canvas 130.3x162.2/ 2024

올해, 그녀는 여러 중요한 전시들을 마주했다. 지난 10월에는 서스테이너블 케이패션아트쇼 초대 작가로 참여했으며 오는 23일까지는 동대문 ddp 이간수문갤러리에서 팀토그 '테이스트오브그린 전'에 참여 중이다.  또한 10월 30일부터 11월 18일까지 갤러리 아트리에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었으며 오는 25일까지는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현 광주비엔날레 대표)이 기획한 전시에 참여한다. 그녀는 이를 단순한 참여 이상의 깊은 울림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년 9월에서 10월에는 아트 스페이스 X의 초대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그녀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을 또 하나의 ‘방’을 짓는 일처럼 느끼며, 조용히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가고 있다.

서스테이너블 케이 패션 아트쇼  초대는 그녀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기획전에 이름을 올리게 된 사실에 깊은 감사함을 느꼈고, 서로 다른 장르가 자연스럽게 맞닿는 협업의 과정은 신선하고 즐거운 자극이 되었다. 프로페셔널한 디렉터와 각 분야의 전문가들, 그리고 개성이 뚜렷한 작가들이 만들어낸 시너지는 전시의 가능성과 확장성을 생생하게 다가오게 했다.  그녀는 이번 경험을 통해 작업이 새로운 문을 여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

최서원 작가/ 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최서원 작가/ 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그녀는 스스로를 ‘범생 작가’라고 말하곤 한다. 일상 속에서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이라면 그녀의 하루는 대부분 작업과 관련된 일들로 채워진다. 오전에는 자료 조사와 재료 연구로 하루의 방향을 잡고, 자연광이 가장 좋은 낮에는 채색과 컬러 실험, 재료 테스트에 집중한다. 저녁에는 색을 다루기 어려운 조명 아래에서 아이디어 스케치, 독서, 작업 관련 글쓰기를 이어간다. 이렇게 하루 12~15시간을 작업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노력’이라기보다 마음을 정돈하고 다시 채워 넣는 과정에 가깝다. 작업은 결국 최서원 작가가 가장 그녀답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Editor’s Say
어쩌면 최서원작가의 작업은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구조’를 그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의자와 책, 쉼과 사유 이 단순한 조합 속에는 인간이 끝내 되찾고 싶어 하는
‘자기 자신과의 시간’이 숨 쉬고 있다.
화려하지 않은 일상의 반복,
하루 12시간 넘게 이어지는 루틴 속에서
그녀는 세상의 소음을 걸러내고,
오직 자신만의 공기를 만든다.
거창하지 않다. 다만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우리가 잊고 있던 ‘머물기’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슈필라움의 문은 늘 열려 있다.
그곳에 들어선 순간,
우린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닿을 곳이 있다는 기대.

그것이 바로, 그녀의 예술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다.

취재=박솔리 기자 solri@beautyhankook.com

사진=석근 기자 hayatos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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