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배려
자아와 관객의 흐름을 조율하는 작품 세계

다니엘 베이커 작가/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다니엘 베이커 작가/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뷰티한국 박솔리 기자] 다니엘 작가의 작업은 거창한 결단의 결과라기보다, 오랫동안 내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수행해오던 일을 드디어 바깥 세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과정에 가깝다. 보이지 않던 것이 서서히 가시화되는 순간들, 다니엘의 회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언어에서 이미지로, ‘결심’ 대신 ‘깨달음’으로 도착한 자리
"지금의 작업 방식은 뚜렷한 계획 없이 시작된다. 물감을 붓고, 얼룩을 만들고, 색을 움직이면서 형태를 잡아간다. 그 순간 솔직하게 느껴지는 방향을 따른다. 어떤 작업은 빠르게 형태를 갖추고, 어떤 것은 끝까지 저항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리듬이다. 다시 돌아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나는 아직 내 안에 머무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다니엘 베이커

parknbak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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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nbaker.com/ 사실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손과 얼굴, 몸짓을 통해 내면의 감정과 기억을 드러내는 다니엘 베이커의 회화. 그의 붓질은 ‘우연과 의도’, ‘감정과 구조’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인간의 내면 풍경을 시각화한다. 새 연작 [Emergence]는 내면의 대화가 형태와 리듬으로 피어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parknbaker.com/ 사실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손과 얼굴, 몸짓을 통해 내면의 감정과 기억을 드러내는 다니엘 베이커의 회화. 그의 붓질은 ‘우연과 의도’, ‘감정과 구조’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인간의 내면 풍경을 시각화한다. 새 연작 [Emergence]는 내면의 대화가 형태와 리듬으로 피어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다니엘에게 예술은 언제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되돌아가던 자리였고, 삶의 방향이 달라질 때마다 다시 찾아가는 일종의 원점 같은 공간이었다. 교육 현장과 미디어 업계에서 일하던 시간에도 머릿속은 언제나 시각적 사고로 가득했다. 아이디어를 문장보다 패턴으로, 개념보다 형태로 떠올리며 세상을 바라보곤 했다.

논리로 구조화된 삶, 말로 닿지 않는 것들을 신뢰하는 연습
한동안 다니엘의 삶은 언어와 논리가 촘촘하게 짜놓은 구조 안에 놓여 있었다. 가르치고, 분석하고, 소통하는 일들이 일상을 채웠고, 의미는 늘 설명과 해석을 통해 완성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시 그림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신뢰하는 법을 새로 배우는 일이었다. 화면 앞에 서면 문장은 점점 뒤로 물러나고, 색과 선, 리듬과 질감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예전에는 그림 속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더 컸다면, 지금의 작업은 의미가 스스로 떠오르고 드러나도록 조용히 기다리는 과정에 가깝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개인적인 감정의 시간이 깊게 깔려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는 법, 상실을 붙들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법, 성장의 고통을 억누르지 않고 함께 머무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 곧 작업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통제하려 들지 않고, 규정하려고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그 감정들과 함께 버티는 연습이 그림의 어휘를 조금씩 바꾸어갔다.

현재 동대문 DDP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전시 중인 테이스트오브그린 전에서는 다니엘의 신작을 만나 볼 수 있다. /뷰티한국DB
현재 동대문 DDP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전시 중인 테이스트오브그린 전에서는 다니엘의 신작을 만나 볼 수 있다. /뷰티한국DB

완벽함이 아닌 ‘감정의 지속력’을 향한 한 겹 한 겹의 힘
다니엘이 자신의 작업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그 핵심은 “감정의 지속력”에 가깝다. 캔버스 앞에서 추구하는 것은 완벽한 결과물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과정’ 그 자체다. 한 번에 완성되는 이미지는 거의 없다. 색을 올리고, 말갛게 지우고, 다시 덧입히는 반복 속에서 화면은 조금씩 두께를 얻는다. 이 리듬은 곧 삶의 리듬과도 닮아 있다. 무너졌다 다시 일어나고, 비워졌다 다시 채워지는 감정의 파동이 한 겹 한 겹 화면 위에 쌓인다.

‘무엇을 느끼는가’와 ‘무엇을 보여주는가’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으려 한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기에는 세상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숨겨두기에는 스스로가 버거워진다. 다니엘의 회화는 바로 그 사이의 공간,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진동하는 감정의 틈에 머문다. 화면은 말하지 않는 대신 오래 버티고, 관객은 그 흔들림 속에서 자신의 리듬을 발견한다.

손과 몸짓, 인체의 잔상으로 말하는 것들
다니엘의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손, 몸짓, 인체를 암시하는 형태가 자주 포착된다. 그것들은 의미를 직접 지시하는 상징이라기 보다, 감정을 매개하고 건네는 형태에 가깝다.

특히 손은 중요한 모티브다. 손은 무언가를 끝까지 붙잡고자 하는 의지와, 이제는 놓아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 양가적인 움직임이 화면 안에서 겹치고 뒤섞이며 복합적인 정서를 만들어낸다.

손과 몸짓은 생각과 행동을 이어주는 다리이기도 하다. 머릿속에서 떠도는 상상과 실제로 만들어지는 이미지, 그 둘 사이의 거리는 늘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다니엘의 회화에서 손은 그 간극 위를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존재처럼 등장한다. 인체의 윤곽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암시와 잔상만 남겨두는 방식 역시 감정의 여백을 관객의 몫으로 돌려주는 선택이다.

다니엘 베이커 작가/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다니엘 베이커 작가/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Sustainable K-Fashion Art Show’가 남긴 또 다른 질문, 감정의 지속가능성
이번 ‘Sustainable K-Fashion Art Show’에 팀토그 초대 작가로 참여한 경험은 다니엘에게도 특별한 의미로 남아 있다. 전시가 던지는 화두는 겉으로는 ‘지속가능성’이지만, 그 안에는 환경과 감정의 과정이 겹쳐지는 복합적인 결이 존재했다. 그에게 지속가능성이란 단지 환경을 보호하는 기술적·제도적 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계속해서 나아가고, 창작하고, 타인과 연결되는 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감정의 지속가능성’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는다.

“어떻게 하면 소진되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창작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나 자신을 소모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서로를 진심으로 연결하면서도 번아웃을 피할 수 있을까?”

다니엘 베이커 작가/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다니엘 베이커 작가/사진=석근 기자/ 뷰티한국 DB

이 질문들은 다니엘의 캔버스 위에서 색과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전시는 지속가능성을 환경적인 차원을 넘어, 내면의 상태와 감정의 리듬으로 확장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다니엘은 그 지점에서 “진짜 지속가능성은 결국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건넨다.

결국 그의 작업은 화려한 슬로건 대신 오래 버티는 감정, 쉽게 닳아 없어지지 않는 마음의 힘을 향해 있다. 언어의 세계에서 이미지를 향해, 완벽함에서 과정의 리듬으로, 환경에서 내면의 지속가능성으로. 다니엘의 회화는 그 모든 이동의 궤적을 담아낸 채, 오늘도 또 한 겹의 색을 조심스럽게 쌓아 올리고 있다.

Editor’s Say
다니엘의 이야기를 작품을 통해 눈으로 들으면,
예술이란 결국 ‘견디는 감정의 언어’라고 다가온다.
세상의 속도는 빠르고, 사람의 마음은 속도를 따라잡느라 자주 허무해진다.
하지만 그는 그 틈에서 멈추는 법을 배웠고,
불확실함과 상실, 그리고 회복의 리듬을 화폭 위에 남겼다.
그의 작품은 내면을 강하게 오래 버티게 하는 힘과 용기가 있다.

한 겹 한 겹 쌓여가는 색의 층처럼,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단단해지는 법을 보여준다.
손끝의 떨림이 감정이 되고, 반복이 리듬이 되고,
그 리듬이 다시 생의 문장이 된다.
다니엘의 회화는 그 진리를 증명한다.
언어보다 깊은 곳에서, 감정의 지속력으로 피워낸 내면의 지속가능성.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마음속에서도 작게 빛나는 문장이 하나 생긴다.

“끝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마음의 온도다.
그리고 그 온도는, 천천히 나를 다시 살아나게 한다.”

취재=박솔리 기자 solri@beautyhankook.com

사진=석근 기자 hayatos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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