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을 위한 화장품, ‘보이는 미’에서 ‘느끼는 미’, 화장품의 새로운 접근성
[뷰티한국 이재현 인턴기자] “보이지 않아도, 나만의 색을 갖고 싶다.” 시각적 경험이 제한적이어도 화장을 통해 개성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이들의 목소리가 산업의 새로운 방향을 움직이고 있다.
‘배리어프리 뷰티(Barrier-Free Beauty)’는 이러한 욕구에서 출발한다. 신체적·감각적 제약이나 사회적 장벽과 상관없이 누구나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포용적 뷰티(Universal & Inclusive Beauty), 즉 ‘아름다움을 가로막는 장벽(Barrier)’을 없애는 접근 방식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최소 22억 명이 근거리 혹은 원거리 시력저하를 겪고 있으며, 이 중 10억 명 이상은 여전히 적절한 치료나 교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뷰티 시장 안에 이미 거대한 잠재적 소비자 집단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부분의 뷰티 제품은 ‘눈으로 보고 고르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삼는다. 로즈 베이지, 선셋 오렌지, 라벤더 퍼플처럼 색을 시각적으로 연상시키는 명칭이 중심을 이루고, 아이섀도우 팔레트를 펼쳐도 시각장애인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칸이 많다”, “색 이름이 나뉘어 있다” 정도에 그친다. 결국 화장 과정의 상당 부분이 시각적 전제 위에 설계되어 있어, 정보 격차는 여전히 크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바로 향기와 촉감으로 색을 읽는 설계 방식이다. 예를 들어, 립 틴트에 ‘장미향=레드’, ‘바닐라향=베이지’처럼 감각적 코드를 부여하거나, 워터프루프 마스카라에 물방울 형태의 촉각 패턴을 넣어 손끝만으로 카테고리와 기능을 파악하도록 돕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히 디자인 요소를 추가하는 차원을 넘어, 제품에 새로운 언어를 부여하는 작업에 가깝다. 눈 대신 향기와 질감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인 셈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 9월 7일 ‘화장품의 날’을 맞아 점자스티커가 부착된 생활용품 1천여 개를 시각장애인에게 기부했다. 점자스티커는 아모레퍼시픽 본사에 근무 중인 시각장애인 직원들로 구성한 유니버설 자문단과 협업하여 기획부터 샘플 검수까지 전 과정을 함께 제작했다. 화장품이나 생활용품 중 스킨, 로션, 샴푸, 린스 등 주요 10개 제품군에 점자를 표기했으며, 점자를 읽지 못하는 사용자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알파벳과 숫자에 양각 처리를 더해 접근성을 높였다. 관계자는 “장애, 성별, 연령에 관계없이 모두가 편리하게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도록 앞으로도 포용적 제품과 서비스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해외에서도 이미 이러한 ‘촉각 기반 화장품’이 실제 제품으로 구현되고 있다. 대표적 사례는 P&G의 헤어 케어 브랜드 ‘허벌 에센스(Herbal Essences)’다. 샴푸와 컨디셔너 용기에 촉각 패턴을 도입했는데, 샴푸에는 세로로 길게 솟은 줄(Stripe)을, 컨디셔너에는 작은 점(Dot) 패턴을 적용해 시각적 정보 없이도 즉시 구분할 수 있게 했다. 시각장애인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일상에서 체감되는 도움이 된다”는 평가가 이어졌고, 실제 사용 데이터를 바탕으로 디자인을 개선한 점 또한 주목받았다.
이 변화는 단지 ‘사회적 배려’에 머물지 않는다. 포용성과 접근성을 높인 설계는 곧 새로운 시장을 여는 전략이 되며, 브랜드가 소비자와 더 깊게 연결될 수 있는 접점을 만든다.
배리어프리 뷰티는 사회적 배려를 넘어, 앞으로의 뷰티 산업이 주목해야 할 새로운 성장 축이다. 접근성과 포용성 설계를 강화하는 브랜드는 새로운 시장을 열고, 소비자 경험의 질을 재정의하며, 더 넓은 고객층과 연결될 수 있다.
화장은 단순히 거울 앞에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시각장애인에게 화장은 ‘보이지 않아도 나답게 사는 방법’이자, 선택권을 갖는 일이다. 그리고 산업은 이제 그 선택권을 확장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향기로, 손끝으로 색을 읽을 수 있는 세상”, 이것이 뷰티 산업이 다음으로 향해야 할 혁신의 방향이다.
